갈곡리성당 자료
[202008]더불어살기_의정부교구 갈곡리성당
- 등록일
- 2023-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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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더불어살기_의정부교구 갈곡리성당
작지만 위대한 신앙 유산을 간직한 곳
김현채 바오로 의정부 Re. 명예기자
양주역에서 북서쪽으로 18km, 문산역에서는 동쪽으로 14km지점 367번 도로 양주?비암리 방향에 위치한 갈곡리성당은 칡의 계곡이라는 이름답게 짙은 수풀과 아름드리나무들이 우거져 있다.
1891년경 박해를 피해 인근 홍천과 풍수원에서 김근배 바오로, 김연배 프란치스코, 박 베드로 가족이 숨어들어와 옹기를 구우며 정착한 곳이었다. 인근 우골(현 우고리)과 칠울(칡 마을), 고령에는 옹기제작에 유용한 점토가 많이 생산되어 정착을 쉽게 하였다.
갈곡리공소는 1898년 약현본당 칠울공소로 시작하여 1900년경에는 한때 신자수가 145명에 이른 적도 있었으나 개성본당공소, 신암리본당공소, 덕정리본당공소, 의정부본당공소, 법원리본당공소까지 120년간 공소로 있었다. 서울대교구에서 의정부교구로 바뀌며 현 신자수가 40명인 공소임에도 초기 교회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준본당으로 승격, 초대 김민철 안드레아 신부님이 부임하고, 2018년에 공소 120주년 기념 및 김치호 베네딕토 신부와 김정숙 마리안나 순교자 기념순례지 지정 기념미사도 가졌다.
현 성당은 1955년 1월9일 미 해병대와 한국 해병대 두 군종신부님의 협조로 현 의정부 주교좌성당을 본떠 지어진 공소성당으로, 당시 서울대교구장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 주례로 축성.봉헌된 것이다. 현재는 2020년 6월말부터 성당내부 리모델링 공사가 진행 중이다. 레지오는 법원리성당 자비의 모후 Cu.(단장 김찬식 요아킴) 소속으로, 2000차 주회(현재 1862차)를 앞두고 있는 샛별 Pr.(단장 송순득 루시아)과 소수이지만 정예단원을 지향하는 치명자들의 모후 Pr.(단장 차영석 바오로) 등 2개 쁘레시디움이 운영 중이다.
한국인 최초 성직 수도자 김치호 베네딕토 신부
남아있는 신앙 공동체중 경기북부에 현존하는 두 곳 중 하나로서, 1963년 7월 법원리성당 신설과 함께 의정부성당에서 법원리성당 관할 공소가 된 갈곡리공소는 오랜 신앙의 역사답게 두 분의 순교자(김치호 베네딕토 신부, 누이인 김정숙 마리안나 수녀)와 하느님의 종(신암리 이춘근 라우렌시오 신부)을 비롯해 사제 및 수도자 20명을 배출한 곳이다.
이곳 갈곡리공소 출신 사제 및 수도자는 최창무 안드레아 광주대교구 대주교, 김남수 루카 부산교구 신부, 김충수 보니파시오 서울대교구 신부, 최준웅 바르나바 서울대교구 신부, 최영식 마티아 서울대교구 신부, 김영옥 요셉 인천교구 신부, 최영선 알렉산델 꼰뻰뚜알수도회 수사, 강명호 마르코 의정부교구 신부, 최무임 성삼의마리이사벨 갈멜수녀원 수녀, 최미카엘라 수녀, 김안나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수녀, 김루시아 한국순교복자회 수녀, 김영희 에스텔 성가소비녀회 수녀, 김충연 마리폴 성가소비녀회 수녀, 최영락 라파엘라 제주성글라라 수녀원 수녀, 전혜경 아녜스 예수성심전교수녀회 수녀, 김스텔라 샬트르 성바오로수녀원 수녀가 있다.
하느님의 종 김치호 베네딕토(1914~1950) 신부는 3월31일 서울대목구 내에서 유명한 교우촌인 갈곡리공소에서 태어나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1926년, 12살의 어린 나이로 서울 백동 성 베네딕토회 수도원에 제화공 견습생으로 들어갔으나, 수도원이 덕원으로 이전한 후 진로를 바꾸었다. 평소 신학공부를 하고 싶어 했던 그는 1927년 12월1일부터 덕원신학교 예비과에 들어가 사제성소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예비과를 마친 후 1929년부터 중등과정을 이수하였고, 1936년 말에는 철학과정을 시작하여 1938년 봄에 마쳤다.
신학교를 다니면서 수도생활에 대한 동경심을 키웠던 그는 1938년 4월9일 덕원수도원에 입회하였고, 법정수련을 시작했다. 성직 지망 수련자가 입회한 일은 성 베네딕도회가 조선에 진출한 지 25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덕원신학교 교지인 신우지에 실린 그의 수도원 입회 소감을 살펴보면, 무르익은 신앙과 그간 신학교에서 쌓은 학식을 엿볼 수 있다.
1939년 부활대축일 다음날 4월10일, 그는 첫 서원을 말하고 바로 신학과에 들어갔다. 1942년 5월1일 덕원수도원 성당에서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에 의하여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덕원수도원이 배출한 첫 한국인 성직수사로 기록되었다. 1942년 6월부터 그는 덕원본당 보좌로 일하면서 청년사목을 담당했다. 강론을 매우 잘했으며 문장도 뛰어났다. 1945년에는 덕원본당 주임으로 임명되었으나, 폐병을 앓아 사목활동에 애로가 많았다.
1945년 5월10일과 11일, 북한 공산당 정치보위부는 두 차례에 걸쳐 덕원수도원을 수색했다. 일차 수색에서 수도원 장상들이 체포되어 평양 인민교화소로 압송되었다. 2차 수색에서는 나머지 독일인 선교사와 그를 비롯한 한국인 신부들이 평양으로 압송되어 갔다. 수감생활은 폐병으로 건강이 좋지 않던 그에게 많은 고통을 주었다. 그는 1950년 10월5일 연합군에 밀려 평양을 버리고 북쪽으로 후퇴하던 북한 인민군들에게 각목으로 구타를 당해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순교가 바탕이 돼 20여명 성소자 배출
그의 누이 김정숙 마리안나 수녀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소속으로 황해도 매화동본당에서 소임 중 1950년 10월15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10월17일 피살되었는데, 마리안나 수녀의 치명 순간은 이렇게 전해진다.
“신음하는 김 마리안나 수녀를 보니 너무나 참혹하여 말로 다할 수가 없었다. 바른팔은 아예 꺾어져 옆에 버려졌고, 뺨은 낫에 베이고 이마는 도끼에 맞아서 불쑥 솟아올랐고, 코는 삼각창에 찍혀서 숨을 쉴 때마다 검붉은 피가 솟았다. 마리안나 수녀는 꾸르륵하는 소리만 내며 괴로워했다. 머리를 흔들며 귀에 대고 큰소리로 “마리안나 수녀!”하고 부르니 “오”하는 작은 소리만 내었다. 앞뒤를 돌아보니 산사람은 하나도 없고 여기저기 시체가 가을바람에 나뭇잎 떨어지듯 흩어져 있었다. 그 뒤에도 김정숙 수녀는 계속 피를 토했다. 이틀을 넘게 계속되더니 17일 저녁 6시가 넘자 작은 소리마저 그치고 말았다.”
이러한 순교의 바탕이 있었기에 비록 작은 공소이지만 20여명에 이르는 성소자를 배출한 것이라 생각된다. 토요일 아침 평일 미사인데도 전 신자 40명의 작은 성당에서 26명의 신자들이 미사전례에 참여하고 있었다. 도심의 성당이 코로나 사태이후 저조한 미사참석률로 고민하는 가운데 평일미사 참석률이 65%라니 어찌 경이롭다 하지 않을 수 있는가. 미사에서 강론하는 김민철 안드레아 주임신부님의 맑은 목소리와 힘 있는 강론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흑백사진> 김치호 베네딕도 신부와 누이 김정숙 마리안나 수녀(사진 평화신문.평화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