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곡리성당 자료
2023-02-03 고난 속에서도 지켜낸 신앙을 기억하며 (민족화해 위원회)
- 등록일
- 2023-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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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속에서도 지켜낸 신앙을 기억하며
2023.02.03
김민철 안드레아 신부
(갈곡리성당 주임신부)
이번 겨울, 제가 살고있는 갈곡리엔 영하 20도에 가까운 매우 추운 날씨가 여러 날 지속되었습니다. 어찌나 춥게 느껴지던지 매일 아침 옆 마을을 넘나들며 한두 시간씩 묵주기도를 하던 습관에 제동이 걸렸습니다. 두꺼운 양말을 신어도 발끝이 아렸고 장갑을 껴도 손가락이 얼어붙는 느낌이었습니다. 털 귀마개는 했지만 찬공기에 노출된 이마며 코끝이 시려 급기야 기온이 올라가는 낮시간으로 묵주기도를 옮겨야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추운 날씨에 저의 연약한 마음이 굴복해 버렸을 때, 문득 기억 속에 떠오른 분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70여 년 전 차가운 북녘땅에서 목숨을 잃으신, 이른바 ‘죽음의 행진’에서 순교하신 외국인 선교사들입니다. 이분들은 1950년 10월 31일부터 11월 17일까지 북한군의 포로가 되어 평안북도 만포에서 중강진을 거쳐 하창리까지 혹한의 날씨와 굶주림을 견디며 무려 280km나 되는 압록강변의 산길을 고통스럽게 걸어야만 했습니다.
이분들 가운데 멜 베아트릭스 수녀님(샬트르 성 바오로 수도회)은 가장 먼저 총에 맞아 피살되셨고, 그 뒤를 따라 이미 고령이었고 건강이 좋지 않았던 파리외방 전교회의 폴 비에모 신부님, 앙투안 공베르 신부님, 쥘리앵 공베르 신부님이 병사하였습니다.
죽음의 행진이 끝난 뒤에도 수용소 생활을 하던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순교는 계속 되었습니다. 가혹한 행군에 뒤따른 추위와 굶주림이 이미 그들의 생명을 거의 다 갉아 먹었기 때문입니다. 가르멜 수녀회의 마리 메히틸드 수녀님과 아기 예수의 테레즈 수녀님, 초대 교황 사절이었던 패트릭 번 주교님, 골롬반 외방 선교회의 프랜시스 캐너밴 신부님, 그리고 파리 외방 선교회 소속의 조제프 카다르 신부님과 조제프 뷜토 신부님이 차례차례 병으로 목숨을 잃으셨습니다.
‘죽음의 행진’에서 제일 먼저 순교하신 멜 베아트릭스 수녀님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은총의 성모 마리아여, 자비로우시고 인자하신 어머니, 우리 원수들에게서 우리를 보호하소서. 우리가 죽을 때 우리를 받아 주소서.”라고 평소 좋아하시던 기도문을 반복해서 읊조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패트릭 번 주교님은 죽음을 앞둔 어느 날, 그간 자신을 돌봐주던 신부님들께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신앙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늘 내 소원이었지요. 좋으신 하느님께서는 내게 이런 은총을 주셨어요. 몸조심하시고, 이제 다른 이들을 돌보세요. 내가 지닌 사제직의 은총 다음으로, 내 생애의 가장 큰 은총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여러분과 함께 고난을 겪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왼쪽부터 멜 베아트릭스 수녀 ⓒ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 대구관구 홈페이지/ 폴 비에모 신부 ⓒ CBCK / 패트릭 번 주교 ⓒ CBCK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굳건히 지키며 하느님께 목숨을 바친 이 순교자들의 이야기는 죽음의 행진과 수용소의 포로생활을 견디고 살아남은 다른 신부님과 수녀님의 증언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증언을 통해 우리는 편안해진 신앙생활 안에서 무뎌져 가는 자신의 믿음을 추스르고 보다 신앙인답게 살아갈 새로운 다짐을 해봅니다.
올해는 한국전쟁이 정전협정을 맺으며 휴전상태로 지속된 지 70년이 되는 때입니다. 한 때, 종전이 선언되고 한반도의 평화와 일치에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으리란 희망이 있었지만 복잡한 국제 정세 속에서 그 희망이 점점 멀어지는 안타까운 상황으로 변해가 마음 아픕니다. 그래서 미약하나마 우리의 기도가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기도 안에서 이 순교자들을 만났습니다. 그때, 단 한 분도 자신의 죽음을 억울해하거나 분노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오랜 세월 지속되고 있는 분단의 현실을 마음 아파하시며 민족의 평화와 일치를 위해 기도해줄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북녘땅의 순교자들이 흘리신 피가 한반도의 평화와 일치를 위한 밑거름이 될 수 있도록 순교자들을 위해, 그리고 이 땅의 평화와 일치를 위해 기도합시다.
하느님, 북한지역의 순교자들을 하늘의 영광스러운 성인 대열에 들게 하소서.
북한지역의 순교자들이시여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하느님께 빌어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