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곡리성당 자료
마리아사랑넷- 의정부교구 성지 목록 (갈곡리성당 소개)
- 등록일
- 2023-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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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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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략설명 | 박해를 피해 형성된 교우촌이자 한국전쟁 순교자 기념 순례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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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번주소 |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갈곡리 182 |
도로주소 |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화합로466번길 25 |
전화번호 | (031)959-1208 |
팩스번호 | (031)959-1209 |
홈페이지 | https://www.facebook.com/Galgokri |
1898년 신자 수 65명으로 약현 본당 소속 칠울 공소가 설립되었고, 1900년 2년 사이에 신자수가 곱절이 넘는 145명으로 늘어났다. 1901년 송도(개성) 본당이 새로 설립되면서 약현 본당에서 송도 본당 공소로 이관되었고, 1923년 신암리 본당 신설로 인하여 칠울 공소는 11년 동안 신암리 본당 공소가 되었다. 1934년 신자수가 급격히 줄어든 신암리 본당이 공소로 환원되고 덕정리 본당이 신설되어 칠울 공소는 1947년까지 13년 동안 덕정리 본당 공소가 되었다. 1947년 의정부 본당이 신설되어 1963년까지 16년 동안 의정부 본당 공소가 되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모바일용 요약 설명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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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시간 안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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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구분 | 요일 | 시간 | 기타사항 |
주일미사 | 일 | 11:00 | 교중미사 |
평일미사 | 화 | 11:00 | |
수 | 11:00 | ||
목 | 11:00 | ||
금 | 11:00 | ||
토 | 11:00 |
<순교자소개>
간략설명 | 박해를 피해 형성된 교우촌이자 한국전쟁 순교자 기념 순례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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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번주소 |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갈곡리 182 |
도로주소 |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화합로466번길 25 |
전화번호 | (031)959-1208 |
팩스번호 | (031)959-1209 |
홈페이지 | https://www.facebook.com/Galgokri |
[덕원의 순교자들] 김치호 베네딕토 신부 - 기대와 사랑 한몸에 받았던 한국인 성직 수도자의 맏배
김치호 베네딕토 신부(한국인 최초 성직 수도자)
▲ 출생 : 1914년 3월 31일 경기 파주 갈곡리
▲ 세례명 : 아우구스티노
▲ 첫서원 : 1939년 4월 10일
▲ 사제수품 : 1942년 5월 1일
▲ 소임 : 덕원본당 보좌, 수련장 보좌, 덕원본당 주임
▲ 체포 일자 및 장소 : 1949년 5월 11일 덕원 수도원
▲ 순교 일자 및 장소 : 1950년 10월 5일 평양 인민교화소
사람이든 사물이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가운데 맏배는 참으로 특별하다.
덕원의 순교자 하느님의 종 김치호(베네딕토) 신부는 한국인 첫 성직 수도자로 상트 오틸리엔 성베네딕도 수도회 소속 모든 수도자로부터 기대와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김치호 신부는 유명한 교우촌인 경기도 파주 갈곡리에서 1914년 3월 31일 태어났다.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 그의 부모는 구교우였다. 어머니는 병인박해 시기에 당신 어머니 등에 업혀 감옥에 갇혀 있었다고 자랑하곤 했다. 아버지와 형은 옹기장이였다. 옹기 만드는 일은 당시 많은 가톨릭 신자들의 생업이였다. 박해시기에 산속으로 피해 들어가 옹기 만드는 기술을 배워 생계를 이었기 때문이다.
김치호 신부는 1926년 열두 살에 루드비히 피셔 수사의 제화공 도제로 서울 백동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에 입회했다. 당시 한국인 입회자들은 엄격한 수도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수도회를 많이 떠났다. "한국인은 우리 수도원 생활을 혹독하다고 여긴다. 매일같이 새벽 4시 반에 일어나는 것은 그들에게 일종의 희생이다. 기도와 낮 동안의 노동 그리고 점심과 저녁 때의 짧은 휴식도 그들에게는 엄청난 부담이다. 이런 생활을 잠시 또는 얼마간 경험해 보고는 결국 많은 이가 떠나가 버렸다"(루치우스 로트 원장 신부, 1937년 「덕원연대기」 중에서). 하지만 김치호 지원자는 수도 규칙과 수도원 생활에 잘 적응해 아주 유능한 구두장이가 됐고 흠잡을 데 없는 구두를 만들어 냈다.
1927년 12월 1일 성 베네딕도회 서울 수도원이 덕원으로 완전히 이전한 다음, 그의 총명함과 원의가 고려돼 김치호는 진로를 바꿔서 신학교 준비반 과정을 시작했다. 1929년부터는 중등과정(초급반 5년, 고급반 2년)을 시작했고, 1936년 말에는 2년간의 철학 과정을 시작해 1938년 봄에 마쳤다. "현재 신학교 철학 과정 학생 중에 실습생 출신이 한 명 있다. 그는 지원자로 시작해 신학교로 옮겨 와서도 늘 자기 반에서 독일인 신학생들에게 뒤처지지 않는 가장 뛰어난 학생이다. 구두 짓는 솜씨도 여전한 데다가 음악적 재능도 지니고 있어 바이올린, 피아노, 오르간, 트럼펫 연주도 잘하고 철학적ㆍ자주적으로 사유할 수 있으니 유명한 사제가 될 전망이 밝다"(1937년 「덕원연대기」 중에서).
김치호는 1938년 4월 9일 성 베네딕도회가 한국에 진출한 지 25년 만에 처음으로 성직 수사 지망 수련자로 선발돼 사부 성 베네딕토의 이름을 수도명으로 받고 법정 수련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듬해 예수 부활 대축일 후 월요일인 1939년 4월 10일 첫 서원을 했다. 그는 첫 서원 후 즉시 신학 과정을 시작해 1942년 5월 1일 덕원 수도원 성당에서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 주례로 사제품을 받았다.
한국인 첫 수도자 사제 탄생은 언젠가는 그와 그의 뒤를 이을 한국인 사제들이 유럽인 신부들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수도회 운명을 결정하리라는 희망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덕원의 독일인 수도자들은 김치호 신부를 '수도원의 황태자'로 부르며 특별 대우를 해줬다. 신부들은 수도원 식당과 회의실에서 평수사들 둘레의 돋은 자리에 앉았다. 이것은 종신서원 후에나 이뤄지는 '승급'이었다. 하지만 김 신부는 예외였다. 덕원 수도자들은 수련자 시절부터 그를 돋은 자리에 앉혔다. 독일인 수도자들이 김 신부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김 신부는 라틴어뿐 아니라 독일어를 완벽하게 구사해 독일인 수도자의 한국말 선생 역할을 했다.
김 신부는 1942년 6월 덕원본당 보좌로 부임해 본당 사목과 한국인 수련자 지도를 도왔다. 그는 아주 훌륭한 강론가로서 청년 사목을 담당했다. 시와 수필에 조예가 깊었던 그는 젊은 독일인 선교사들의 한국어 강론 준비(번역과 윤문)에 많은 도움을 줬다. 그리고 1944년 덕원 수도원 수련장 보좌로 임명됐고, 1945년에는 덕원본당 주임으로 사목했다.
건강을 돌보지 않고 사목 활동에 헌신하던 김 신부는 1946년 1월 폐병으로 쓰러졌다. "그는 사제가 되고 몇 년간 너무 많은 일을 했습니다. 다시 일할 수 있으려면 아마도 1~2년은 쉬어야 할 것입니다. 날마다 미사를 집전하는 것 말고는 아무 일도 못합니다. 그가 언제 다시 일하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1947년 「덕원연대기」 중에서).
1949년 5월 11일 밤 북한의 공산당 정치보위부원들이 덕원 수도원에 들이닥쳐 모든 독일인 선교사뿐 아니라 한국인 김치호ㆍ김종수(베르나르도)ㆍ김이식ㆍ최병권(마티아) 신부 등을 체포해 평양 인민교화소로 압송했다.
"밤 12시 30분에 또다시 종소리가 수도자들을 잠에서 깨웠다.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 등이 체포된 지 이틀 후였다. 필요한 짐을 이미 꾸려 뒀던 수도자들이 마음을 단단히 먹고 현관 앞에 모였다. 정치보위부 요원들이 책상 앞에 다리를 벌리고 앉았다. 누군가 수도자 명단을 가지고 있었다. 부원장 신부부터 시작해 수도자 전부를 하나하나 불러내어 한 줄로 정렬시켰다. 독일인 신부와 수사, 한국인 신부들이 차례로 트럭에 올랐다. 결핵을 앓고 있던 김치호 신부는 폐가 한쪽밖에 없었다. 그때까지 자기 방에 누워 있던 그가 빠진 것을 알아차린 정치보위부 요원들이 그의 방으로 안내하라고 했다. 그러고는 잠들어 있는 사람을 총으로 찔러 깨웠다. 그렇게 신부가 모두 사라지고 수도원은 고아원이 돼 버렸다"(김삼도 마인라도 수사 증언 중에서).
평양 인민교화소에서 김치호 신부는 8㎡ 면적의 습기 찬 좁은 감방에 동료 18명과 함께 갇혔다. "김베네딕토 신부는 폐병을 앓고 있었다. 그는 탁한 공기 속에서 거의 숨을 쉬지 못했다. 그는 호흡 곤란으로 인해 밤중에는 발작적으로 코를 골아 우리는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가련한 형제를 깨울 수가 없었다. 이 비좁은 공간에서의 공동생활에서는 전염의 위험성이 아주 높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폐렴 환자가 어디 다른 격리된 공간으로 옮겨질 수 있도록 해달라고 계속해서 부탁했다. 그러나 그런 조치는 내려지지 않았다”(「북한에서의 시련」 중에서).
1950년 10월 5일 북한 인민군들이 평양 인민교화소를 말끔히 비우고 북쪽으로 후퇴할 때, 김치호 신부는 폐병으로 각혈이 심한 상태였다. 인민군은 그를 다른 수도자들과 함께 후송하지 않고, 각목으로 때려 죽였다. [출처 : 평화신문, 2013년 6월 9일, 리길재 기자]
남북대화의 징검다리가 되고픈 김정숙 마리안나 수녀
우리 역사상 가장 큰 민족 이동은 6·25전쟁 때 일어났다. 천만 명을 헤아리는 대규모 이동이었고, 그중 상당수가 북에서 남으로 옮겼다. 지금도 남쪽에는 북한에 두고 온 고향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많다. 남북대화는 피해갈 수 없는 민족 현안이다. 당시 월남하지 못한 남매가 있었다. 누나 김정숙(1903.10.18.~1950.10.17) 수녀는 황해도에, 동생 김치호(1914.3.31.~1950.10.5.) 신부는 함경도에 있었다. 동서로 나뉘어 주님을 따르던 남매는 거의 같은 시기에 공산당에게 희생되었다. 그리고 현재도 누나는 홍용호 주교와 동료 순교자로, 동생은 신상원 보니파시오와 동료 순교자로 시복과정을 밟고 있다. 그 누나의 삶을 통해 주님 메시지를 읽고자 한다.
교우촌 칠울공소의 뿌리깊은 신앙 가족
김정숙은 파주 칠울 공소(현 의정부 교구 갈곡리 준본당)에서 아버지 김화서 베드로와 어머니 김인순 마리아의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마지막 박해시기에 할머니 등에 업혀 감옥에 갇혀 있었다고 하며, 한 집안에서 한국교회 아홉 번째 신부인 김원영 신부가 나올 만큼 뿌리 깊은 구교우 집안이다. 칠울 공소는 최창무 대주교를 비롯하여 사제 · 수도자 20여 명을 배출한 교우촌이다. 김화서 슬하에서도 장남과 막내를 제외하고 다섯 명이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러나 김명호는 신학교에서 4품까지 받고 나왔고, 다섯째 딸은 건강 때문에 치료차 집으로 보내졌다. 그 밑의 딸도 수도회에 입회했으나, 일제 말기 수녀원의 식량난으로 ‘작은 수건 수녀’들을 퇴회시킬 때 나오게 되었다. 수도자가 된 두 남매는 치명했다. 이 집안은 일찍 칠울 공소를 떠났다. 그들은 김치호가 숭공학교에 입학하는 1920년대 이미 서울 아현동에 살고 있었고, 김치호가 수도원에 입회하게 되면서 가족들은 수도원이 있는 덕원으로 이사를 했다. 그들은 초기에는 덕원 수도원 일을 도우며 수도원 내 공간에서 생활했고, 나중에는 수도원 소유 농장을 소작했다. 김정숙의 남동생 김명호는 덕원 신학교 주방장을 했다. 고향을 떠난 초기에는 온 식구가 김원영 신부의 사제관에서 복사일을 하기도 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 여러 곳을 전전한 것 같다.
김정숙 수녀는 황해도 매화동 본당 봉삼유치원에서 1926년 9월부터 순교하는 날까지 24년간 교육사도직 활동을 했다. 김정숙 수녀는 1921년 수녀원에 입회하여 1928년 첫서원, 1934년에 종신서원을 했는데, 유치원 소임은 서원하기 전부터 시작했다. 이름이 묵주를 가리키는 매화동 마을에는 성당을 중심으로 약 30가구의 신자가 살고 있었다. 이 본당은 1896년 황해도 첫본당으로 설립되었다. 2대 주임 우도 신부는 1898년 봉삼학교를 세웠고, 2년 뒤부터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들이 파견되었다. 봉삼유치원은 1926년 4대 주임 퀴를리에 신부가 설립했는데, 설립 때부터 김정숙 수녀가 맡았다.
“수녀를 돕자”, 매화동본당 신자들의 단결
민족이 해방되고 북한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기승을 부렸다. 이때 매화동 본당에는 김정자, 김정숙, 강양자 수녀 셋이 해방 이후 위태로운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공산당 법령에는 ‘신앙의 자유’라는 문구가 있었다. 그러나 그 자유는 내용이 달랐다. 세상은 변했다. 해방 바로 다음 해 수녀들은 길에서, “무슨 짓을 못해서 비과학적인 종교로 사람을 미혹하게 하느냐?”, “그따위 옷은 무어냐?”고 소리치며 돌멩이를 던지고 모래를 뿌리는 아이들과 마주쳤다. 이런 세월을 3년이나 겪고 그들은 학교에서 쫓겨났다. 수도복이 혁명사업에 방해가 되니 평복으로 입으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퇴직했다. 공산당은 교회의 육영사업이나 신자들의 단체 행동을 금했다. 미사 참례를 방해하려고 주일마다 신자들을 오전 다섯 시부터 동원하여, 삼십 리 밖에 가서 땅을 파고 증명서를 받아 인민위원회에 제출토록 했다. 성당에서는 새벽 세 시에 주일 미사를 드렸다.
이러한 시달림에도 불구하고 천주교 신자의 품격은 어디서나 드러났다. 북한에서는 이론적으로 모든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 분배한 것으로 설정했다. 그리고 농지 값에 해당하는 엄청난 양의 현물세를 부과했다. 교회도 공산당 토지개혁으로 모든 부동산을 몰수당했고, 성당 근처의 과수원만을 신부와 수녀들의 자작농지 명목으로 인정받았다. 어느 날 느닷없이 복숭아 현물세로 소 마차 20대 분을 다음날 오후 3시까지 도착시키라는 명령이 있었다. 이를 이행하지 못하면 숙청하려는 올가미였다. 이때 성당 회장 이하 모든 단체가 나섰다. 그날이 주일이었는데, 평소 새벽 3시에 봉헌하던 미사를 더 당기고 총출동했다. 정오가 넘자 현물세 전 분량이 준비되었고, 신자들은 점심도 거르고 2시 40분에 군 인민위원회에 도착했다. 숙청 기회를 노리던 그들은 불량한 물품으로라도 흠을 잡으려고 하나하나 일일이 조사했다. 결국 그들은 “이 물건은 최상품이니까 평양에 올린다.”고 했다. 수녀들은 온갖 구실로 트집 잡는 이들을 분노하지 않게 하면서 자신들이 지켜야 할 본분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6·25전쟁이 터진 뒤인 7월 17일 이여구 본당 신부가 납치됐다. 공산당이 사제관을 지역 노동당 위원장인 학교장 사택으로 쓴다며 무시로 드나드는 속에서 수녀들은 성체 훼손을 막고 성물과 교회 문서들을 보존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예수를 따른다’는 수도서원의 참혹한 실천
1950년 10월,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해주에 상륙했다는 소문이 들리고, 퇴각하는 공산군들이 양민을 학살하고 가옥을 방화했다. 이때 우익청년들의 멸공 시위가 일어났다. 10월 14일 밤에 숨어있던 우익청년들이 나와서 좌익을 몰아내었다. 그러나 10월 15일 공산당들이 들이닥쳤다. 새벽 5시쯤 유엔군인 줄 알고 나왔던 사람들이 모두 처참하게 당했다. 그들은 수녀들을 찾아내어 밖에 세웠다. 그리고 군중들이 달려들어 총, 칼, 낫, 도끼, 몽둥이 등으로 수녀들을 때렸다. 그들은 수녀들이 쓰러지자 버리고 갔다. 여덟 시간쯤 지나 강양자 수녀가 의식을 되찾았다. 왼팔이 으스러지고 왼쪽 다리가 창에 찔렸는데, 전신이 피에 엉겨 땅에 달라붙어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강양자 수녀는 김정숙 수녀의 치명 순간을 이렇게 전했다.
“신음하는 김 마리안나 수녀를 보니 너무나 참혹하여 말로 다할 수가 없었다. 바른팔은 아예 꺾어져 옆에 버려졌고, 뺨은 낫에 베이고 이마는 도끼에 맞아서 불쑥 솟아올랐고, 코는 삼각창에 찍혀서 구멍이 뚫렸다. 그 구멍에서 숨 쉴 때마다 검붉은 피가 솟았다가 뺨으로 흐르는 것이 마치 분수와 같았다. 주위는 소라도 한 마리 잡은 것처럼 검붉은 피가 낭자하게 엉겨 있었다. 마리안나 수녀는 꾸르륵하는 소리만 내며 괴로워했다. 기어가 머리를 흔들며 귀에 대고 큰소리로 “마리안나 수녀!” 하니까 “오” 하는 작은 소리를 내었다. 앞뒤를 돌아보니 산 사람은 하나도 없고 여기저기 시체가 가을바람에 나뭇잎 떨어지듯 흩어져 있었다. 동네 개, 돼지들이 죽은 사람에게서 흐르는 피를 핥아먹으며 돌아다녔다. … 그 뒤에도 김정숙 수녀는 계속 피를 토했다. 이틀도 넘게 계속되더니 17일 저녁 6시가 넘자 소리도 작아지고 코에서 피 대신 하얀 물이 나오더니 그것도 그치고 말았다.”
강양자 수녀는 자기 몸도 가누지 못하지만, 김정자 · 김정숙 두 수녀의 장례를 치러야 했다. 마침 도착한 문 요한나(후일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 쁘로타시오 수녀)와 할머니들이 한복차림의 두 수녀 시신에 수도복을 입혔다(수녀들은 9월 25일부터 평복을 했다). 하지만 관이 없었다. 학교의 탁구대로 관을 하나 짰고, 또 하나는 동네 할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마련해 둔 것을 구해 2주일 만에 입관했다. 그러나 사람이 없어 매장을 할 수가 없었다. 그 후 유엔군이 평양에 진격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우익청년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해서 16일간이나 수녀원 마당에 방치됐던 관을 성당 옆에 묻었다.
김정숙 수녀의 가족은 김치호 신부의 권고로 해방 이듬해 월남하여 아현동 일대에 자리 잡았다가 이후 수원 왕림동에 정착했다. 38선을 넘나드는 사람들이 무시로 소식을 전해주었다. 김정숙 수녀보다 약 보름 앞서 치명한 김치호 신부의 부음이 전해졌을 때, 그의 부모는 밥상을 받고 있다가 둘 다 쓰러졌다. 3일 후 부친이 죽고, 그 3일 뒤 모친이 죽었다. 김정숙 수녀의 치명 소식이 이 이전에 알려졌는지는 분명치 않다.
순교자가 보내는 편지
순교란 혼자 이루는 은총이 아닐지 모른다. 매화동 본당 수녀와 신자들 모두는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단 한번도 공산당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 도우며 천주교인의 고고함, 인간다운 고고함을 잃지 않았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박해자 자신들이었다. 물론 신자들에게는 체험으로 얻은 용기가 남았다. 오늘날 북한에 교회가 아직도 살아있는 건 이러한 기억의 열매일 것이다. 북한의 체제와 교회는 별개이다. 북한 교회는 힘겹게 유지되어 왔다. 그리고 그들 신앙의 열정 덕택인지 1970년대부터 북한이 가톨릭 교회를 대하는 태도가 변하고 있다. 더욱이 1980년대부터 북한 교회 접촉을 시작한 고종옥 신부는 6·25전쟁 중 칠울 공소를 도왔고, 민족화해위원회를 만든 최창무 대주교는 칠울 공소 출신임도 의미심장하다. 당시 교회에서 일어난 일을 철저히, 자세히 돌아보고 각기 상호 무지, 오해, 상황, 이념에서 빚어진 요소들을 찾아내면서 남한과 북한은 서로 가까이 다가설 수 있다. 한반도 중간지역 칠울에서 태어난 김정숙 수녀의 삶과 신앙은 남북대화의 징검다리가 될 수 있다. 1950년 11월 강양자 수녀가 월남할 때, 매달리던 매화리 교우들은 “매화리 교회를 대표해서 주교님께 하루빨리 신부님을 보내 주십사고 말씀드리기 위하여 가시는 겁니다.” 하고 말하며 수녀를 놓아주었다. 그 부탁은 언제쯤 전달되는지?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19년 여름(Vol. 46), 글 · 사진제공 김정숙 소화 데레사(영남대 국사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