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소 발굴 역사

묘소 발굴

등록일
2024-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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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영 묘소로 추정되었던 묘소 발굴은 1980년 8월 31일부터 9월 3일까지 진행되었다. 묘소 발굴에는 변기영 몬시뇰, 유홍렬 교수(당시 서울대학교 종교사학과 교수), 황용호 교수, 황두희(당시 판윤공파 종친회 회장, 황사영 직계손), 황인석(당시 감사공파 종손), 현학봉, 고승덕 기자 등이 참석했다. 발굴에 참여했던 황용호 교수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내일 그러면 거기에서 만납시다 하고 양주 가막골까지 들어갔는데, 들어가서 보니까 일꾼들 준비 산 관리인한테 해놨고, 일꾼들 다 준비되고 있는데, 거기 가서 삽 잡기 전에 변신부님 들어가서 예배 보고 그리고 일꾼들이 넉가래 삽에다가 저거 하는데, 넉가래로 옆에 하는데, 그 순간이 그때 아마 11시 조금 전이었는데 순간 제 마음이 일꾼들이 일하면 막걸리가 필요하겠다 해서 거기에서 한 200-300미터 딱 내려와서 개천 옆에 가게 집에 가서 술 한 말 넣어놓은 거 한 말 받아서 그것도 차로 가지고 세워놓고 올라오니까 그때가 콩밭이고, 8월 말 전에, 8월 29일인가 아마 30일인가 그랬는데, 거기를 가니까 변신부님이 콩밭사이로 내려오시면서 여기 유골 없다고 이러면서 내려오시더라고.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하니까 여기 유골 아니고 화장터라고.>

 

[묘소를 발굴중인 유홍렬 교수(좌)와 황용호 교수(우)]

   

 

변기영 몬시뇰은 묘소에서 나온 까만 돌을 보고 ‘화장터’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발굴 작업이 보다 진행되자 검은 오지항아리가 하나 나왔고 생석회로 덮여 글씨가 적혀 있는 큰 검은 돌과 여러 개의 검은 돌들이 발굴되었다. 하지만 일꾼들이 돌을 옮기면서 큰 검은 돌에 적혀 있던 글씨는 훼손되고 말았다. 발굴 인부들이 돌을 옮겼으므로, 황용호 교수는 인부들에게 검은 돌들을 원래 있던 자리에 갖다 놓으라고 하자 그 검은 돌들이 십자가 형태를 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황용호 교수 증언에 따르면 십자가는 가슴 부위에 가장 큰 돌이 놓여 있었고 나머지 돌은 위로 하나, 양옆으로 두 개씩, 밑으로는 세 개가 놓여 있었다. 십자가 모양을 하고 있는 돌들은 우연히 놓일 수 있는 위치도 아니거니와, 일부러 불에 그을려 검게 만들어 다른 주변의 돌들과는 확연이 구분되었다. 이를 놓고 황용호 교수는 두 가지 해석을 제시했다. 하나는 당시 신자들이 황사영 묘를 만들면서 돌들을 주워 잡스러운 것을 다 태우고 성스럽게 하여 이곳에 보관하였을 것이라는 것, 또 하나는 대역부도의 판결을 받아 능지처사형을 당한 황사영의 묘소 위에 십자가를 대놓고 만들지 못하니 그 안에 십자가를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묘소에서 발굴된 검은 돌로된 십자가]

 

그리고 특이한 점은 십자가 왼편, 사람 손으로 보자면 왼손 손목에 해당하는 지점에 검은 오지항아리가 놓여 있었다는 점이다. 이 오지항아리 속에는 청화백자합이 들어 있었고 그 청화백자합 안에는 토시가 들어 있었는데, 이 토시는 황사영이 왼손에 착용하고 다녔던 것으로 보인다. 황사영이 16세에 장원을 하였을 때 정조가 따로 불러 황사영이 20세가 되어 자신을 찾아오면 관직을 주겠다고 말한 이후부터 임금이 잡은 손을 누구든 함부로 잡을 수 없다며 자신의 손목에 늘 붉은 비단 토시를 끼고 다녔다고 한다. 이는 황사영이 배론에서 잡힐 때 손을 번쩍 들면서 “이놈들, 내 몸은 포박해도 내 손은 포박 못 한다.”라고 이야기한 것과도 연결된다. 따라서 십자가 왼쪽에 놓인 청화백자합 속의 토시는 황사영 묘소를 확인시켜주는 주요한 증거의 하나가 된다.

 

황사영 묘소 발굴 당시 황용호 교수가 관(棺)과 비슷한 것을 보았다고 증언하여, 관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추정은 되나, 이를 발굴하지는 않아 진위여부는 아직 확인되지 않은 상태이다. 황용호 교수는 발굴 당시에 오지항아리 위쪽을 길게 생석회로 덮어씌운 관을 확인할 수 있었고, 관 위에는 무슨 글씨가 써져 있었는데 젖은 흙이라 그 글씨를 읽을 수 없었다고 증언하였다.

 

그후 조심조심 작업을 진행, 오지항아리 위쪽을 길게 생석회로 덮어씌운 관을 확인할 수 있었다. 관 위에는 무슨 글씨가 써져 있었는데 젖은 흙이라서 그 글씨를 읽을 수가 없었다. 더 작업을 하여 발굴하자는 사람도 많았으나 나는 강력히 제지하고 이로서 작업은 끝이 났다.

 

[묘소발굴중인 변기영 몬시뇰과 황두희 종친회 회장]

 

황용호 교수가 관이라고 본 것이 황사영 유해를 모신 관인지는 확인되지 않은 채 그대로 흙을 덮어 묘소 발굴을 마쳤는데, 황용호 교수는 이후 인터뷰에서 그 상태로 발굴을 마친 이유에 대하여 두 가지로 설명하였다. 첫째, 이미 발굴된 유물(검은돌 십자가와 청화백자합)만으로 황사영 묘소인 것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며,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발굴하여 관을 열어보았으나 유골이 소골 되어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황사영 묘의 진위 여부 자체가 논란이 될 수 있다고 본 것이었다.

 

[황사영 묘소에서 발굴된 오지항아리와 청화백자합]

 

 

황사영의 묘소임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 중 하나인 십자가 모양의 돌은 묘소 발굴 당시 다시 제자리에 두어 흙을 덮었으므로 묘소 안에 그대로 놓여 있으며, 또 다른 증거인 검은 오지항아리와 청화백자합은 묘에서 꺼내 종손이 보관하고 있다가 2004년 4월 6일에 한국교회사연구소에 기증하였다. 현재는 한국천주교 순교자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한국천주교 순교자박물관이 2009년에 재개관하면서 황사영 토시가 담긴 청화백자합과 오지항아리를 일반 신자들에게 처음 공개하기도 하였다.

 

[황사영 후손의 청화백자합 기증]

 

 

[한국천주교 순교자박물관에 전시된 오지항아리와 청화백자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