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소 발굴 역사
묘소 증거
- 등록일
- 2024-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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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한 묘소가 황사영 묘소임을 입증할 수 있는 근거를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청화백자합 속의 토시이다. 돌로 놓인 십자가 끝에서 발견된 청화백자합 안에는 부패를 방지하려는 듯 고령토로 채워놓았고 그 속에서 천이 발견되었다. 이 천은 검증 결과 비단(견)임을 확인되었다. 구전에 따르면 황사영이 16세에 증광시에 합격한 뒤 임금이 그의 손을 잡으며 훗날 탁용을 약속했다고 한다. 황사영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토시를 싸매고 다녔는데,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할 당시에도 이 토시를 착용했다는 증언이 있다. 황사영 순교 이후 시신을 옮긴 후손과 신자들이 이 토시를 합 속에 특별히 넣어 십자가 옆에 보관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둘째, 십자가 돌이다. 봉분을 헤쳐내자 남쪽으로 십자가가 검은 돌로 놓여 있었다. 당시는 천주교의 박해가 심해 땅 위에 십자가를 세울 수 없어 땅 속에 십자가를 세웠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특히, 이 십자가는 주변의 큰 돌은 주워서 형태를 만든 것으로, 다른 돌과 구분하고 또 십자가 형태를 분명하게 하고자 검게 태워 만든 점이 특색이다.
셋째, 묘지기와 묘지기 부인의 증언이다. 11대째 묘지기를 하고 있는 현학봉은 선친으로부터 옛날에 역적으로 몰렸던 진사 어른의 묘가 있다는 것을 전해 들었고 직접 눈으로도 확인하였다. 현학봉의 부인 역시 선산 관리를 함께 하면서 황사영 묘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넷째, 종친 가승에 의한 묘자리 확인이다. 창원 황씨의 가승에 의하면 황사영의 묘소가 선영 아래에 있다고 적혀 있으며, 창원 황씨 판윤공파의 후손인 황용호 교수는 1967년 즈음, 후손 황인석씨로부터 직접 황사영 묘소를 안내받았다. 가승으로는 황사영의 묘가 아닌 진사공의 묘라고 전해 왔으나 그 진사에 대해서 “장원 급제를 하셨고 그 다음에 서학으로 인해 멸문지화를 봤고...” 등의 설명으로 비추어 보아 그 묘가 황사영의 것이 맞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