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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를 기억하며 - 노강(시인)

등록일
2025-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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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 개혁군주 22대 왕 정조의 탕평 정책으로 1790년 9월 12일 정조는 이날 특별히 시험장에 나와 합격자들을 친견하고 70세 이상의 고령 합격자와 20세 이하 소년 합격자를 따로 불러 한차례 시험을 더 치렀다. 16세 최연소 합격자였던 황사영은 임금이 직접 점수를 매긴 시험에서 1등의 영예를 안았다. 그 뒤로 황사영은 임금이 잡았던 손목에 평생 띠를 두르고 다녔다. 10년을 손목에 감고 다녔던 견직물인 명주로 만든 토시이다. 이 토시로 인하여 이백 년 가까이 잠들어 있던 고령토 속에서 덩어리진 검은 천 조각이 나왔고 비로소 그의 묘가 확인되었다니 기적이었다. 1980년 8월부터 9월까지 창원 황 씨 17대손 황용호 당시 동국대 교수와 교회사를 연구하는 성직자들의 노고로 발굴되었다고 한다.

 

몇 년 전, 성지순례를 3년간 남편과 다니면서 성지에서 만난 황사영(1775~1801)의 무덤은 한국 근대사에서 잊힌, 그러나 결코 잊힐 수 없는 인물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양주 송추계곡 가마 산 35번지이다. 천재는 정조의 총애로 출세의 길이 활짝 열려 있었지만 출세의 길을 마다하고 고난과 박해만이 기다리는 신앙의 길을 흔들림 없이 걸어가다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하여 26세의 젊은 나이에 신앙에 대한 열정과 패기로 베론 성지 토굴에서 쓴 조선교회의 박해 상황과 외국의 도움을 청하는 내용의 백서로 인하여 서울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으로 순교하였다.

 

가산도 몰수되고 어머니 이윤혜는 거제도의 노비로 부인 정명련(정약용의 조카)는 제주 대정현(현 제주 모슬포 인근)의 관노로 유배를 갔고, 십 년 만에 얻은 외아들 어린 아기 황경헌(묘비명은 황경한)은 추자도(현 제주시 추자면)에 남겨져 어부의 손에서 자라 선종하였다고 한다. 황사영이 썼던 “백서”는 조선왕조를 부정한다거나 국가를 전복하려는 데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로지 조선의 정치적 모순을 해결함으로써 신앙의 자유를 얻으려는 데 있었기에 역적으로서의 모습만 부각된 역사에서 진실이 밝혀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황사영 백서에 대한 후대의 격렬한 반응은 전체 백서가 아닌 가백서 만을 본 것이 우려가 컸고 백서 원문에는 황사영이 청나라에 조선을 편입해달라고 요청한 부분이 없다. 사람들은 편집된 가백서만 보고서 황사영의 이름에 거품을 물었고 그의 요구는 오직 신앙의 자유, 하나였다. 백서의 원본은 1894년 갑오경장 당시 의금부와 포도청에 산더미처럼 쌓인 문서를 소각 정리하면서 다시 세상에 나왔고 이를 본 관리가 폐기 직전에 천주교도이자 자신의 친구였던 이건영에게 백서의 원본을 건네면서 세상에 다시 등장한다. 이건영은 이를 당시 조선 대목구장 뮈텔 주교에게 넘겼고, 뮈텔 주교는 이를 다시 1925년 순교자 79위 시복 당시에 교황 비오 11세에게 봉정하면서 바티칸 민속박물관에서 소장하게 됐습니다. 이것이 바티칸이 황사영 백서 원본을 소장하게 된 연유였다.(한양대 정민교수 인용)

 

전국 188곳의 성지순례 중 한 곳으로 의무적으로 순례해야 하는 성지 완주의 차원이었지만 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지금이라도 그의 가족들을 합장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슬픔이 슬픔에게 이어지는 현실에서 눈물을 닦던 성지였다.
정약용(1762~1836)의 큰형인 정약현의 장녀이자 정약용에게는 조카인 사랑하는 아내 정명련과 아들 황경헌과 어머니를 모시고 행복하게 살았던 서울시 마포구 아현동 생가에서 모여 잠들게 하여주길 기도했다, 물론 하늘나라에서는 가족이 모여 있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천주교 명례방 사건으로 시작해서 학문으로 시작된 자발적 선교가 된 조선의 천주교는 조선 왕조의 유교사상과 정치적인 이유, 또한 천주교 교리에 대한 무지로 자행된 5대 박해(신해,신유,기해,병오,병인)의 역사에서 만 명의 순교자가 넘지만 자료만으로 103위만 성인으로 추대 되었다. 신앙의 자유를 얻기까지 밀알이 된 교회사의 역사가 불편한 진실이 있었다 할지라도 제대로 밝혀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박해가 끝난 시점에서 제일 먼저 순교자들의 자손들을 살펴 주었다면 황사영의 아들 황경헌이 추자도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아내 정명련의 삶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기록이라도 남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아 있다.

 

현재 천주교인은 오백만으로 양적으로 성장하였지만 질적으로는 반성해야 할 숙제가 남아 있다. 지금이라도 늦었지만 천재 황사영의 진심을 이해하고 그의 백서를 통해 천재가 고백한 “신앙은 곧 세상을 구하는 좋은 약이라고 생각되어 신앙을 지켰다”라는 그의 고백을 새삼 되돌아봐야 할 가르침으로 우리에게 주고 가셨음을 신앙인들 누구나 잊지 말길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