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사영 순교자
황사영(黃嗣永, 1775-1801, 알렉시오)은 남인이었던 창원(昌原) 황씨(黃氏) 판윤공파(判尹公派)가문에서 황석범(黃錫範)과 이윤혜(李允惠)의 유복자로 서울 아현에서 태어났다. 그는 15세 때인 1790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이어 그는 같은 해 복자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의 맏형 정약현(丁若鉉)의 큰 딸 정명련(丁命連, 일명 난주[蘭珠]) 마리아와 혼인하였다. 이는 그가 천주교를 접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니, 같은 해에 처삼촌들과 처고모부 이승훈(李承薰) 베드로 등에게서 천주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입교 이후 황사영은 임금이 약속했던 관직도 버리고 밤낮으로 교리를 연구하였다. 그리고 정약종, 홍낙민(洪樂敏) 등과 함께 토론하면서 신앙을 키워나갔다. 1795년, 20세가 된 황사영은 최인길(崔仁吉)의 집에서 주문모 신부를 만나 신앙을 고백하고 알렉시오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은 이후 황사영은 있는 힘을 다하여 주문모 신부의 성직 수행과 다른 온갖 일들을 도왔다. 그는 자신의 삶을 온전히 진리의 증거를 위해 투신하며, 교회를 위해 어떠한 위험도 무릅쓰고 사제와 신자들을 돌보았다. 주문모 신부와 정약종, 최창현, 홍낙민 등 교회 지도자들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조선 땅의 신앙의 빛을 이어가겠다는 마지막 일념으로 토굴에서 『백서』를 작성하였다.
박해자들로부터 체포되어 의금부로 압송된 황사영은 11월 14일(음력 10월 9일)부터 신문을 받았다. 이때 그는 “천주교는 올바르며, 나라와 백성에게 해가 되지 않는 종교입니다.”라고 하면서 신앙을 굳게 증거하였고, “<백서>를 작성한 목적은 신앙의 자유를 얻으려는 데 있었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1801년 12월 10일(음력 11월 5일)에 대역부도(大逆不道)의 판결을 받고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사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26세였다.
황사영은 평신도로서 온전히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고 목숨마저 내놓은 순교자이자 한국천주교회의 신앙의 유산이다. 그렇기에 황사영의 삶을 본받고자 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를 향한 삶을 시작하는 것이자 구원에 대한 확신과 하느님 나라를 향한 투신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순교자 묘소를 순례하는 일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확신과 구원의 희망을 향한 직접적인 발걸음을 딛는 일이라 할 수 있다.
황사영은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에 포함되어 하느님의 종으로 현재 시복을 위한 예비심사가 바티칸 교황청 시성성에서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