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강론: 2021년 7월 18일(연중 제16주간 일요일/농민 주일)
- 등록일
- 2021-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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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6주일(나해, 2021.7.18)
예레 23,1-6; 에페 2,13-18; 마르 6,30-34
거리두기 4단계 조치 후 처음으로 맞는 주일입니다. 예사롭지 않은 올해 더위 속에서 잘 지내고 계시는지요? 저희 사제와 수도자 모두 잘 지내고 있습니다. 공지해 드린 대로, 상대적으로 좁고 시원한 공간이라는 생각에서 결정했던 소성전에서의 미사는 대성전으로 옮겨 봉헌하고 있습니다. 이틀을 미사 봉헌해 보니, 습기가 만만치 않아 대성전으로 올라오게 된 겁니다. 크고 넓은 공간에서 저희 사제단은 제단에서, 수녀님 두 분께서는 각각 중앙 맨 앞 좌우에 자리해서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7시 미사인지라, 조금 참을 만해서 냉방기는 목요일 딱 하루 살짝 가동했습니다. 평소에도 땀을 많이 흘리시는 두 분 신부님께서도 아직까지는 잘 견디고 계십니다.
여러분께서 봉헌해 주시는 미사 지향과 아울러 우리 교우분들을 함께 생각합니다. 특히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할 때마다 성당 좌석에 앉아 계셨던 여러분과 더불어, 부득이하게 미사 참례 못 하고 계시는 우리 인창동 본당 가족들을 떠올립니다. 본당 부임 후 몇 개월 되지 않았지만, 봉성체를 기회로 인사드렸던 분들의 안부가 궁금합니다. 단독주택에 사시는 분들도 계셨는데, 이 더운 날씨 속에 잘 지내고 계실까 노파심까지 듭니다. 우리 서로의 기도 가운데, 우리 주변의 어려운 분들에 대한 기억도 한 번씩 포함해 주셨으면 합니다.
우리 역동적인 대한민국의 작년 이맘 때를 기억하십니까? 그 여파가 무척이나 심해서 지금도 여전히 후유증을 앓고 있고 또 그 논란의 불씨가 완전히 꺼지지 않은 주제가 막 터져나왔던 시기였습니다. 바로 ‘공정과 정의’였습니다. 너무나 좋고 분명한 용어였지만, 본인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주인공이 되었던 인물에 대한 호불호가 겹치면서 이 논란은 점점 거세지기만 했습니다. 급기야는 내년 대선에 나서겠다는 정치인들과 그 주변 사람들 일부는 여성 또한 남성과 똑같은 훈련 강도를 겪게 해야 한다는 남녀동등 군복무 주장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간 겪어 왔던 정치인들 입씨름을 익히 알고 있는 우리들인지라, 그 진정성에 물음표가 붙을 수밖에 없기는 합니다. 애초에 부각됐던 ‘공정과 정의’ 역시도 정치적 의도가 많이 포함되어 있었음을 기억합니다. 폭염과 바이러스의 위험 속에서 지내며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사고와 판단 역시 보다 더 냉철하고 이성적으로 펼쳐질 수 있도록 하는 지혜가 더 더욱 필요한 요즘인 듯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해 무척 단호한 당신의 뜻을 전하고 계십니다. 양 떼를 파멸시키고 흩어버린 목자들’의 악한 행실을 벌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들을 벌하시고 새 날을 약속하시며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시겠다는 당신 계획을 드러내십니다. 그 싹을 통해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시겠다는 겁니다. 마치 작년부터 지속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논란을 훤히 아시는 것처럼 그 똑같은 말을 언급하시면서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분노하셨던 ‘목자들의 악한 행실’의 결과가 바로 그것입니다. ‘양 떼를 파멸시키고 흩어버린’ 것에 하느님께서는 불행한 목자라고 선포하고 계십니다.
예레미야 예언자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오늘 두 번째 독서 말씀에서 사도 바오로가 전하고 있는 ‘공정과 정의’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우리 가슴 속에 깊이 새겨두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한때 멀리 있던 여러분이 하느님과 가까워졌다’고 먼저 전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시기에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음’을 말하고, 또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과 화해’하도록 하셨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갈라세우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게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분께서는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져 있다고 생각하며 실의에 빠져 있는 병자와 가난한 이들, 공동체에서 외면받고 있는 이들에게 오셔서 하느님께서 그들 또한 기억하고 계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 주셨습니다. 그들 또한 하느님 나라로 초대받은 주인공들이라는 사실을 더 크게 선포하셨습니다. 당신의 말씀을 한 번이라도 더 들으려 멀리까지 따라나서는 그들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오늘 복음서 저자는 아주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지쳐 있는 사도들과 함께 배를 타고 외딴 곳으로 군중을 피해 떠나가셨지만,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그들보다 먼저 도착해서 일행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에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고 전합니다. ‘목자 없는 양들 같았던’ 그들에게 주님께서는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본당 가족 여러분, ‘공정과 정의’는 누군가를 심판하고 또 내 편, 네 편 갈라세우기 위한 개념이 아닙니다. 공정과 정의가 이루어지는 바로 그 순간과 현장이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서 먼저 체험하는 현장인 동시에 모두가 평화를 체험하는 순간인 겁니다. 의로운 싹이 열매를 맺어 공정과 정의를 이루는 그 곳엔 서로를 향한 손가락질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서로를 용서해 주고 화해하며, 서로에게 ‘함께 하고 있는’ 행복을 제공해 주는 확인의 장이 되는 겁니다. 서로를 일치하게 해 주는 겁니다. 이와 반대로 거울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을 감추거나 변질시킨다면, 그리고 다른 사람을 향한 잣대랑 달라진다면, 바로 그 순간 ‘불공정’이 되어 서로를 의심하고 분열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불공정의 세상에서는 당연히 정의롭게 사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것이고, 불의와 타협하고 눈 감는 사람은 세상에서 출세한 슬기로운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화해와 일치를 위해 애쓰는 사람은 ‘이대로 잘 살아왔고 별일 없었는데, 공연히 세상에 분란을 초래하는’ 귀찮은 존재로 낙인 찍힐 수밖에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시작된 이 자가격리의 시간들, 서로를 향한 원망과 손가락질을 하나씩 씻어내는 기회로 삼읍시다. 따로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시고자 하셨던 주님의 그 마음은 분명 당신 사명에서 회피하기 위함이 아닌 충전의 뜻이었음을 기억합시다. 우리 함께 이 시간들을 신앙 회피 혹은 해방이 아닌 충전이요 ‘신앙의 백신’을 스스로에게 접종하는 시간으로 봉헌하도록 합시다. 주님의 시선이 머물렀던 곳, 그 분께서 말씀하시며 힘과 위로를 전해 주셨던 그 사건과 사람들을 자주 우리 마음 속에 초대해 봅시다. 바로 우리를 통해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당신의 뜻을 가득 담은 ‘의로운 싹’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우리 사는 이 세상에 ‘공정과 정의’, ‘화해와 용서’를 통해 서로가 가까워지도록 이끌고 계십니다.
“그의 시대에 유다가 구원을 받고, 이스라엘이 안전하게 살리라.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고 부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