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전례/기도

사순 제1주간 수요일(2020년 3월04일) 강론

등록일
2020-03-04
조회
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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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4_강론_사순제1주간수요일.hwp

200304 사순 제1주간 수요일

 

아주 먼 옛날 탄광에는 환기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광부들은 산소가 모자라지 않은지 측정을 하기 위해서 방법을 찾아야 했답니다. 그리고 찾은 방법은 광부들이 광산에 들어갈 때 카나리아라는 새를 데리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산소에 민감한 카나리아는 조금만 산소가 부족해도 죽어버리기 때문에, 카나리아가 노래를 계속하는 동안은 탄광에서 계속 일해도 괜찮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광부들은 탄광에 들어갈 때 카나리아 한 마리를 데리고 들어갔고, 카나리아의 노래가 작아지면 광부들은 산소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곧바로 짐을 싸서 그 카나리아를 데리고 탄광을 빠져나왔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요나 예언자의 표징도 광산의 카나리아와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나 예언자는 니네베 사람들에게 가서 이제 40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 3,4)라고 경고합니다. 이 말을 들은 니네베 사람들은 회개하였고, 하느님께서는 니네베에 내리겠다고 하신 징벌을 거두셨습니다. 요나 예언자의 예언은 마치 카나리아의 노래처럼 니네베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던 것입니다.

요나 예언자를 자세히 살펴보면 오늘 복음이 더 재미있게 읽혀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요나에게 니네베로 가서 회개하라는 복음을 전하라고 합니다. 니네베로 가려면 동쪽으로 가야하는데, 요나는 하느님의 명령을 피하려 서쪽 끝까지 도망치려합니다. 요나가 하느님의 명령을 듣지 않았던 이유는, 자기 민족 이스라엘과는 원수였던 니네베인들이 구원받는 것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는 잘 알다시피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켰다가 사흘만에 니네베에 요나를 내려놓습니다.

요나를 비롯해서 이스라엘 민족들은 자신들만이 선택된 민족이기에 구원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원수였던 아시리아인들을 사랑하고 구원하려고 합니다. 요나에게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겠지요. 그러자 주님께서는 니네베인들과 더불어 요나에게도 회개를 요구하십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참지 못하는 요나에게도 회개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하신 말씀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미 하느님의 계명과 모세의 율법을 잘 지키고 있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외적으로 죄를 짓고 있었을까요? 아마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외적으로는 충분히 의로웠고 이미 구원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보증 받은 자신들에게 회개하라는 그리스도의 말이 더 듣기 싫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의로움에 가득 찬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그렇다면 죄인들, 아픈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자비가 내려오는 것은 괜찮습니까?” 하지만 이 역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리스도는 어떻게 됩니까? 죽음을 맞이하게 되죠. 마치 요나 예언자가 사흘 동안 물고기 배 안에 갇혀 있었다 풀려난 것처럼, 그리스도 역시 사흘 동안 죽음의 동굴 안에 갇혀 있다가 부활하십니다.

아마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목숨을 바치심으로써 가장 강력하고 최종적인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마치 카나리아가 노래를 멈추고 죽음으로써 광부들의 목숨을 살려주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써 죄 많은 인류를 구원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어떤가요? 우리는 충분히 의롭게 살고 있습니다. 생활에서 법을 어기며 사는 것도 아니고, 죄를 짓지 않으려 노력하며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한 발짝만 더 나아가길 원하고 계십니다. 바리사이들은 명시적인 법을 어겨서 회개를 못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죄인들이 구원받는 것을 보기 싫어서였습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배척받아야 마땅한 세리들, 장애인들, 나병환자들, 죄인들에게 하늘나라가 너희에게 있다고 한 예수 그리스도가 꼴 보기 싫어서 죽였던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가 이미 의롭다면, 이제는 측은지심을 가져야할 때입니다.

증오와 미움이 보편적인 감정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하는 한 마디의 말에 날이 서있고, 상처를 줍니다. 그리고 내 것을 나누는 것이 쉽지 않고, 누가 주는 것을 받는 것도 경계하게 됩니다. 점점 우리가 사는 세상은 차가워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자비를 받아들이는 마음을 갖게 된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조금 더 너그러워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조금만 더 따뜻한 세상이 되길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하루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 예수님의 애정어린 음성이 가득하시기를 청하며 오늘 복음환호송의 말씀으로 강론을 마치겠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너그럽고 자비로우니 이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