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전례/기도

3월 20일 사순 제3주간 금요일

등록일
2020-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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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제4주간금요일.hwp

사순 제3주간 금요일

오늘 복음 끝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느님 나라는 마르코 복음에서 굉장히 중요한 모티브입니다. 마르코 복음을 시작하며,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받고 광야에 다녀온 뒤, 사람들에게 했던 첫 번째 말이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 1,15)이기도 했지요.

그렇다면 하느님 나라는 어떤 곳일까요?
마르코 복음 사가는 하느님 나라를 가리켜 물리적인 나라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성경을 직역하자면, ‘나라’라는 장소적 개념보다는 ‘하느님의 다스리심, 하느님의 권능’이라는 번역이 적절하다고 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나라는 조금 더 역동적이고 살아 숨쉬는, 어떠한 힘이라는 맥락에서 읽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이미 왔다”고 표현하고 있으며, 마태오 복음 역시 “하늘 나라가 거의 다 왔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하느님 나라가 시간의 문제도 아니며 공간의 문제도 아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사람들의 노력 여하에 달려있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 그들이 간절히 바랐던 하느님 나라는 이미 사람들 사이에 있었습니다. 대가를 지불한 것이 아니라 무보수로 이미 주어졌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면 복음서의 다른 부분들은 하느님 나라가 누구에게 있는지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라는 구절부터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루카 4,18)까지. 예수님의 말씀으로 보건데 하느님 나라는 이미 이 세상에서 배제된 사람들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모든 유다인들은 하늘나라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 혁명을 일으켜 로마로부터 독립을 해야 하늘나라가 올 것이다.” 혹은 “내게 있는 율법을 더 철두철미하게 지켜야 하늘나라가 올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정화되어야 하늘나라가 올 것이다.” 라고 생각하며, 계속해서 하느님과 거래를 하고, 획득하려 했습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전혀 현실성 없는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면, 하느님 나라는 멀리 있지 않다.”

그렇지만 사랑을 실천하기 쉽지 않은 세상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저에게도 예수님의 가르침은 때때로 힘겨운데, 세상에서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분들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또 다른 짐이 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또 사랑을 강요하는 것도 일종의 폭력이 될 수 있고, 제가 하는 말이 단순히 현실성 없는 뜬 구름 잡는 말은 아닐지 걱정도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사실 우리 마음속 깊은 곳을 바라보면, 다툼이 아니라 사랑을 원하고, 미움이 아니라 용서를 바라고 있다는 진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마음 속 내밀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예수님의 씨앗이 이미 우리에게 뿌려져 있다는 사실 역시도 체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썩게 내버려둘지, 잘 키울껀지 결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마음을 척박한 땅으로 만들지는 않길 기원합니다.
 
조용필의 바람의 노래를 아시나요? 그 가사는 이렇습니다. ‘나의 작은 지혜로는 알 수가 없네. 내가 아는 건 살아가는 방법뿐이야. 실패와 고뇌의 시간이 비켜갈 수 없다는 걸 우린 깨달아야해. 이제 그 해답이 사랑이라면, 나는 이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겠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미 사랑의 씨앗을 뿌렸고, 이 씨앗은 우리에게 영원히 배부르게 할 열매를 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헛된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밭은 함께 잘 가꾸고, 그리스도의 씨앗을 함께 잘 키워나갈 수 있길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