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전례/기도
3월21일 사순 제3주간 토요일
- 등록일
- 2020-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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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3주간 토요일
가끔 제 바닥을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처음엔 인정하기도 싫어 모른척하고, 현실적인 이유를 들어 어쩔수 없이 그렇게 행동했다는 합리화를 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 시기가 지나면 기도 안에서 깨닫게 됩니다. ‘나는 이 정도 밖에 안되는 사람이었구나. 참 비참하구나. 이래도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면 창피해서 꼭 어디로 숨고 싶습니다. 몇 년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는데요, 그때 저를 위로해 주었던 사람은 오늘 복음에서 만난 세리였습니다.
몇 년 전일입니다. 저는 신학교 학생회 부회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정의를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세상의 불의에 분노했고, 불공정함에 대해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다른 대학교의 젊은이들 역시 목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그때 공부를 함께했던 수사님 몇 분이 우리학교는 아무것도 안하느냐고 제게 물었습니다. 그분들에게 제가 했던 말은 이랬습니다. “저희 학교는 신학원 자치회가 있고 부제님들이 있어서, 아마 그 분들이 하실것입니다. 다른 신학교들도 모두 총학생회에서 목소리를 내었습니다.”
저는 그때의 마음을 똑똑히 기억합니다. 무언가를 하고는 싶었지만, 그런 눈에 띄는 행동을 하기도 싫었고, 더더욱 그 짐을 제가 지기는 싫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논리정연하게 누군가에게 미뤘던 것이다.
그 당시 부제님들은 상황들에 밀려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끝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수석 자치회와 부제반을 비난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인 빌라도처럼 손을 씻고, 제 책임은 쏙 뺀 채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가 의로운 사람인양 만족을 느꼈고, 다짐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선배가 되면 그러지 않겠다고, 당당해져야겠다고 말입니다.
그때 제대로 저의 바닥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저의 모순적인 의로움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을까, 부제가 되어서 저는 다시 비슷한 문제를 직면했습니다.
납득하기 힘든 일들을 부제가 되어 신학교에서 경험했습니다. 사실 많은 시간동안 ‘지금은 옳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이해할 수 있을 거야.’라는 말로 제 감정들을 눌러놓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순명이란 가치로 승화시킨 것이 아니라, 그 상황들을 직면하지 않고 회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제가 겪은 신학교의 상황들이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틀린 것이 아니라, 다름에 대한 문제였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하려면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제가 스스로를 비참하다고 느꼈던 이유는 묻지 못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적어도 납득할 수 있는 이유, 혹은 그것을 따라야만 하는 하느님의 가치를 묻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분노의 대상을 찾았고, 처음엔 신부님들께 분노했지만, 결국 제 자신에게 실망했고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제가 두려웠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런 질문을 해서 불쾌할 수도 있는 신부님들이 두려웠을까요? 갑자기 긁어부스럼을 만들었다고 할 동료들의 시선이 두려웠던 것일까요? 아니면 저는 나약한 사람이라 처음부터 할 수 없던 것이었을까요? 어쨌던 그동안 의로움에 대해 그렇게 열심히 말해왔음에도 저는 사실 그 정도 밖에 되지 않았고, 제 신앙 역시 너무나도 얄팍했음을 그때 인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당시 저를 위로해주었던 것은 오늘 복음의 세리였습니다. 세리의 기도를 묵상하며 저는 다시 한번 주님께 돌아왔던 것을 기억합니다.
세리는 기도 중에 자신의 비참함을 마주합니다. 그는 자신의 바닥을 목격했고, 하느님께 울부짖습니다. 아마 그가 하느님께 말했던 것은 ‘나는 이 정도 밖에 안되는 사람이라고,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고백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를 가리켜 예수님은 역설적으로 의로움을 말씀하시죠.
의로움은 앞으로 다시는 죄를 짓지 않을 존재론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세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또 죄를 지을 것입니다. 다만 의로움이란 것은 자신의 비참함을 마주하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고백하고, 겨자씨 한 알만큼이라도 지금보다 나아지길 희망하고, 그렇게 자신의 바닥을 하느님께 개방하는 것입니다.
저 역시 주님께 기도하며 다시 한번 희망합니다. 세리처럼 겸손하지는 못해도, 혹은 이런 감정들 역시 바리사이의 기도와 같은 오만한 마음은 아닐까 의심도 하지만, 사순시기에 주님께 다시 한번 바래봅니다. ‘지금보다 조금만 더 나은 사람이 되길, 그리고 제 얄팍한 의로움에 우리 주님을 우겨넣지 않길’ 하고 말입니다.
따뜻한 봄이 되었네요. 하지만 우리의 삶은 아직 겨울인 것 같아요. 그래도 이런 분위기에지지 맙시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계속 해야겠지만, 따뜻한 공기를 마시며 아니면 가족들과 시간들을 나누며, 혹은 주님께 침묵 중에 기도하며, 우리 모두 봄을 만끽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1독서로 강론을 마치고자 합니다. “그러니 주님을 알자. 주님을 알도록 힘쓰자. 그분의 오심은 새벽처럼 어김없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비처럼,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