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보성인

 

 

 

 

- 식사동성당 주보성인 성 프란치스코 요약

 

성 프란치스코

   

1. 아씨시의 역사 

로마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아씨시는 고고학적, 기념비적인 유적들이 있어 고대 도시임을 말해주고 있다.

12세기, 아씨시는 황제파의 자유도시로 선포되면서 뻬루지아에 대항해 계속해서 싸웠다. 이 기간동안에 아씨시는 시장이 열리는 광장, 황제의 성, 성모 마리아 대성당과 성 루피노 성당을 중심으로 재형성되었다. 12세기초, 도시의 새로운 정비는 시장이 열리던 광장을 시민 생활의 중심으로 만들어 놓았다. 같은 시기에 세워진 성 프란치스꼬 대성당은 도시 내의 시설과 도시 자체의 역사를 결정지음으로서 이 시기는 프란치스꼬 수도회의 탄생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고 할 있다.

오랜 시기에 걸친 뻬루지아의 지배가 끝나고 1353년과 1367년 사이에 아씨시는 교황청의 지배를 받아 오다가 몇몇 외국의 영주, 용병대장, 그리고 다시 교황청의 지배 시대를 거쳐, 1500년도 초, 교황 바오로 화르네세(1534-1549)의 재임 기간 동안에 마지막으로 교회 국가에 흡수되었다.

17세기에서 18세기에 새로 지은 건물들은 중세 도시의 일부로 흡수되고, 1700년도 말, 나폴레옹 군대에 의해 대성당의 보물실과 도서관은 약탈을 당하였다. 1800년도 후반, 이탈리아의 통일과 함께 수도회의 재산들은 국유화되었다. 1900년도에 들어와서 복고풍의 중세 양식으로 지은 건물들의 개축은 도시공간을 최종적으로 바꾸어 놓은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2. 성인의 생애

  프란치스꼬는 1182년 아씨시의 포목상인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와 삐카 부인이라고도 하는 죠반나 사이에서 탄생하였다.

1190년성 조르죠 성당의 부속 학교에 다니면서 기본적으로 라틴어와 아버지의 상업을 이을 목적으로 수학을 배웠다.

1194년오르똘라나 부인과 아씨시의 귀족인 파바로네 디 알프레듀쵸 사이에서 글라라가 탄생하였으며, 뒤이어 아녜스와 베아트리체 두 여동생이 태어났다.

1196년프란치스꼬는 아버지의 가게에서 장사를 시작하였다.

1198년교황 루치오 3세가 돌아가시고 새 교황으로 인노첸시오 3세가 선출되었다. 아씨시는 훼데리꼬 바르바로싸의 봉건제도에 투항하여 큰 성채를 파괴하고 황제의 총독을 추방하였다. 아씨시는 자유도시가 되면서 봉건체제에서 벗어났다.

1199년아씨시 귀족들의 추방이 있었으며, 아씨시와 뻬루지아간의 전쟁이 발발하였다.

1202년프란치스꼬는 아씨시의 군대에 지원하였다. 뻬루지아와 했던 전쟁은 아씨시의 참패로 끝났다. 프란치스꼬는 거의 1년 가까이 뻬루지아에서 포로로 남았으며, 가족들은 전쟁에서 참패한 그를 애정보다는 깊은 병 때문에 몸값을 치르고 석방해 왔다.

1204년오랜 동안의 병고생활은 프란치스꼬로 하여금 그의 미래를 다시 조명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1205년영광스러운 군인의 꿈을 안고 교황청의 징집군대와 더불어 뿔리아를 향해 출발한 프란치스꼬는 스뽈레또까지 갔다가 다시 아씨시로 돌아왔다. 같은 해에 뻬루지아와 아씨시는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아씨시의 평원에서 “신비한 나환자”를 만난 이후, 로마로 순례를 하면서 그는 한 거지와 옷을 바꾸어 입고 성 베드로의 무덤에서 그가 가진 돈을 모두 봉헌하였다.

1206년성 다미아노 성당의 십자가상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교회를 쇄신하고 재건할 임무를 맡겼다. 성 다미아노 성당, 스피나의 성 베드로 성당 그리고 뽀르치웅꼴라 성당을 수리하였으며, 성모 마리아 대성당 광장에서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속의 모든 것을 포기하였다. 십자가를 그으면서 한 농부의 망토를 걸치고, 나환자들이 있는 성 베레꼰도와 굽비오로 갔다. 그리고 후에 은수자의 옷을 입고 성 다미아노로 다시 돌아왔다.

1208년뽀르치웅꼴라에서 미사도중 탁발 사도직의 소명을 깨달았으며, 베르나르도, 피에트로, 에지디오가 여기에 합세하였다. 같은 시기에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카타리파의 이단에 대항해 십자군 전쟁을 포고하였다.

1209년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프란치스꼬와 그의 동료들이 올린 공동체적인 삶의 계획, 즉 “복음적 삶의 양식”을 구두로 인준함으로서 교황은 프란치스꼬가 세운 공동체에 “지리적 한계를 두지 않고 어디서든 설교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였다. 설교자들의 삭발은 자격을 인정하는 표시가 되었으며, 프란치스꼬와 그의 동료들은 리보또르또의 버려진 오두막에 거처를 마련하였다. 형제들은 프란치스꼬가 주교좌 성당에서 설교 할 때에 불 마차의 환시를 목격하였다. 9월, 교황당의 브룬스위크의 오또 4세는 아씨시를 지나 로마로 여행을 하게되자 프란치스꼬와 형제들은 권력과 백성들이 황제에게 마련한 성대한 환영 식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1210년아씨시의 “귀족”과 “하층민”은 “사회 조약”에 서명하여 민생 권리의 상호 존중을 체결하였다. 프란치스꼬와 그의 형제들은 한 농부에 의해 쫓겨나 리보또르또의 오두막에서 나와 수바시오에 있는 성 베네딕도 수도원의 마카베오 원장이 준 뽀르치웅꼴라로 거처를 옮겼다.

1212년뽀르치웅꼴라에서 프란치스꼬는 글라라를 봉헌하였다. 바스띠아와 수바시오의 베네딕도 수도원에 그녀를 의탁하였다가 후에 그의 여동생 아녜스와 다른 두 명의 동료들이 생겨나자 성 다미아노에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1213년5월, 키우시에 사는 올란도 백작은 아레쪼에 있는 베르나 산을 프란치스꼬에게 기증하였다. 프란치스꼬는 모로코를 향한 여행을 하면서 사라센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시리아까지 가려고 시도해 보았다. 이것이 바로 프란치스꼬 수도회의 선교활동의 시작이 되었다.

1215년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제4차 라테란 공의회를 개최하여 오류에 대항하고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삶의 개혁에 박차를 꽤 하였다. 프란치스꼬 역시 다른 수도회의 설립자들과 마찬가지로 이 공의회의 개막에 참석하였으며, 거기에서 구츠만의 도메니코를 만났다. 공의회는 프란치스꼬 수도회의 설립을 인정하였다.

1216년인노첸시오 3세 교황이 서거하고 오노리오 3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교황은 프란치스꼬가 회교도들에 대항한 십자군의 활동을 저지하고자 하였다는 몇몇 추기경들의 비난을 누르고 뽀르치웅꼴라의 전대사를 인정하였다.

1217년뽀르치웅꼴라에서 있었던 성령강림의 총회에서 열 두 관구를 선정하여 각각 원장들을 임명하였다.

1219년모로코로 5명의 형제들을 파견하였으며, 그들은 후에 프란치스꼬 수도회의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프란치스꼬는 평화와 형제애로만 무장한 채 제5차 십자군과 함께 이집트를 향해 출발하여 술탄 말렉 엘 카밀에게 그리스도교 복음인 하느님께로 개종할 것을 제안하였다.

1220년프란치스꼬는 형제들을 위한 서약서를 마련하였다. 9월 22 일에 발표한 오노리오 3세의 교황교서는 수도회의 문서 보관소에 저장되어 있다.

1221년3월, 프란치스꼬의 첫 대리자인 피에트로 가따니가 죽음으로서 3월 10일 프란치스꼬는 그의 새로운 대리자로 엘리야 형제를 선출하였다. 또한 “회개자들의 모임”인 프란치스꼬의 재속회가 탄생하였다.

1223년11월 29일, 오노리오 3세 교황은 그의 [Solet annuere] 교서를 통해 형제회의 설립을 인정하면서 프란치스꼬의 회칙을 인준하였다. 성탄절 날 프란치스꼬는 교황청에서 인정한 양식에 따라 리에띠의 그레치오에서 구유미사를 성대하게 봉헌하였다.

1224년성령강림절 날 있었던 총회에서 영국 관구를 설립하여 9명의 형제들을 파견하였다. 십자가 현양 축일인 9월 14일 베르나 산에서 프란치스꼬는 그의 금욕적, 신비적 삶의 정점인 오상을 받았다.

1225년프란치스꼬는 성 다미아노의 움막에서 깊은 병고생활을 하면서 저 유명한 "태양의 노래"를 지었다.

1226년10월 3일, 뽀르치웅꼴라의 수도원에서 자매인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 다음날, 아씨시의 성안에 위치한 성 조르죠 성당에 그의 유해를 모셨으며, 그의 유해는 매장하지 않은 채 석관에 모심으로서 그를 따르는 사람들과 방문객들이 가까이 가서 볼 수 있도록 하였다. 그의 대리자인 꼬르또나의 엘리야 형제는 재속 사제들로부터 몇 명의 형제들이 성인의 무덤을 경비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