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암리 다이어리
연중제14주일 - 성 김대건 안드레사제 기념일
- 등록일
- 2024-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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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연중제14주일이지만, 의정부교구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를 주보성인으로 모시고 있기에 대축일에 준하는 전례를 하도록 공문이 내려왔습니다. 미사는 감사송 제1양식으로, 강론은 '한국천주교회의 전래와 김대건 신부님의 약사'를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참회예절 대신 '성수예절'을 했습니다. 앞으로도 미사 중에 성수예절을 하기로 했습니다.
또한 작년에 수여하기로 했던 교구장 축복장을 오늘 전달했습니다. 구역장, 반장 봉사를 했던 교우들을 중심으로 축복장이 전달되었습니다. 또한 미사 후에는 7월 사목회의가 있었습니다.
사목회장님의 인사와 안건으로는 쉼터 소식에 대한 곽글라라 자매님의 자세한 설명이 있었습니다. 또한 쉼터 제초작업은 돌아오는 수요일 7월 10일 오전 5시 30분부터 실시하기로 하였습니다. 또한 9월 8일 본당의 날을 맞이해서는 '한마음수련원' 프로그램을 알아보고 본당에 맞는 것을 선택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매 주일 미사 때 '보편지향기도' 네번째 내용은 신암리성당 공동체의 청원을 담아서 기도하기로 했습니다. 매주 준비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겠지만 신암리성당 교우들의 청원이 주님 앞에 기도드리는 기회가 되릴 믿습니다.
오늘은 연중제14주일 다이제스트에 기고한 강론 내용을 게시하겠습니다.
<연중제14주일나해>
나는 선입견이 없는 사람일까? 나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생활하고 있지는 않을까? 나는 편견이 다른 사람보다는 적을까?
어린 시절 이런 말을 하면서 친구들과 놀던 기억이 있다. ‘원숭이 똥구멍은 빨개,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길으면 기차, 기차는 빨라, 빠르면 비행기, 비행기는 높아, 높으면 백두산.’
하지만 이 놀이는 사과는 빨개야 하고, 사과는 맛있어야 하며, 세상에서 백두산이 제일 높다는 선입견을 가지게 했다. 나의 그 선입견이 초록색 사과를 만났을 때 신기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사과가 아니라고 부정하게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백두산이 제일 높다고 믿었던 나는 백두산보다 높은 산이 세계에는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속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렇듯이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선입견을 가지고 생활하고 있다. 그래서 지식이 확장되지 않거나 개방적인 태도를 갖지 않는다면 고정관념에 사로잡히게 된다.
자신의 선입관과 관련되는 사건과 일이 일어나면 무비판적이고 감정적인 태도가 나온다. 선입관이 합리화되고 고정되면 편견(偏見)이 되고, 객관적 사실이 왜곡 인지되어 그 모순을 깨닫지 못한다. 인종적 편견 ·사회적 편견 등은 대부분 선입관에 기인한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당신 고향에서 복음 선포에 실패하셨다고 전한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그들의 선입견과 편견 때문에 예수님의 새로움을 보지 못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이 병자에게 하시는 일을 보면서도, 그분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은 목수이며 가족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출신성분을 기본으로 하는 앎이었다. 하지만 그 앎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알아보는데 장애가 되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선입견에 머무르지 말고 이웃 안에 새로움을 보면서 살라고 가르치셨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이웃이 미워서 원수로 보였던 그 순간의 선입견에 갇혀 있지 말고 사람의 새로운 모습을 보라는 말씀이다.
형제를 용서하라는 말씀은 형제가 잘못을 범할 때 나에게 비쳤던 그 미웠던 모습의 선입견을 지우고 지금 그 사람이 발산하는 새로움을 보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세상에서 무의미한 말들을 많이 듣고 속으면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가 살펴볼 일이다. 사랑한다는 말이 빈말이거나 속이는 말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경험하기 한다.
자비로운 행위라고 믿었던 것이 실제로는 탐욕의 위선이었다는 사실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런 경험에서 우리는 사랑이고 자비라는 말은 믿을 것이 못 된다는 선입견을 가질 수 있다.
그런 선입견을 가진 사람에게 하느님이 사랑하시고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새로움으로 다가오지 못한다.
유다교 지도자들은 하느님은 율법에 따라 엄하게 심판하실 것이라는 편견에 사로잡힌 나머지 예수님의 새로움을 보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 편견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을 죽였다.
옳은 일이 옳은 일로만 통하지 않는 우리 세상이다. 하느님의 일을 행하신 예수님이 처형되어 돌아가신 것은, 이 세상은 의인을 의인으로 알아보고, 의인으로 대접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하는 신앙고백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듣는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생명을 사셨고, 우리는 그분의 삶을 보면서, 하느님을 알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로서 모시기 위해서, 우리의 잘못된 선입견과 고정관념, 편견에서 벗어나야 하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대부분 이것들은 불충분하고 부정확한 근거에 기초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사건이나 대상을 실제보다 긍정적으로 높게 평가하거나, 부정적으로 낮게 평가하는 경향도 있다.
내 앞에 있는 상대와 세상에 대한 정확한 앎과 지식이 필요하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폐쇄적이고 옹졸한 틀의 세상에 머물지 말고, 그 틀을 넓히는 일을 시작해야 하겠다. 다른 배경을 가진 이들을 만나고 대화하면서 인정하는 시도를 해야 한다.
‘나와 너, 우리’에 대한 지식과 정보가 많을수록 서로를 알게 되고, 아는 만큼 공감하는 능력이 커지리라 믿는다.
서로 다른 기억과 경험을 지닌 이들이 만나 자신의 편견과 선입견을 발견하고 그래서 다른 세상, 다른 이들에 대한 편견을 줄이고 이해하는 힘을 키워가기 위해서, 나와는 다른 너를 향해 걸어가는 발걸음이 멈추지 않기를 성령께 도움을 청한다.
편향된 반쪽 눈이 아니라 평평한 시야로 사람을, 세상을 바라보는 좋은 편견이 많아지는 세상을 희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