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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9 전신자 피정 자료 < 마르코 복음에 나타난 예수님 마음 닮기>
- 등록일
- 2026-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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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복음에 나타난 예수님 마음 닮기
왜 마르코 복음인가? 마르코 복음은 가장 처음에 쓰여진 복음으로써, ‘그리스계 그리스도인’을 위해서 쓰여진 복음입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그 말씀은 온전히 우리에게서 이루시기 위해서 오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처음에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은 아니지만,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여 새롭게 주님의 자녀가 된 이들을 위하여 이 말씀을 통해서 거룩한 자녀가 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르코 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마음을 통해서, 완전한 일치를 위한 신앙생활의 여정을 모두와 함께 걸어나가려고 해야할 것입니다.
세례를 받으시다 (1.9) -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모든 일의 시작이며 완성인 세례를 통하여 주님께서는 요한에게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십니다. 성령꼐서 비둘기처럼 그분에게 내려오시고, 아버지께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말씀하신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시작이며 완성’인 세례, 우리가 받은 세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첫 번째 본을 보여주십니다. 그분을 위해 길을 닦은 세례자 요한과 세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일을 시작하시는 주님, 이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얼마나 걱정하고 머뭇거리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분의 마음을 닮는다는 것은, 그분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것임을 어렴풋이 느낍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신 다음 광야로 가시어, 단련을 받으십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주님도, 단련이 필요하셨습니다. 그분의 단련은 우리를 위한 ‘과정’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자신의 광야’를 찾아, 그 안에서 ‘고독’을 느끼며 하느님꼐 온전히 의지하려는 자신을 발견해야 합니다. 진정으로 ‘홀로’ 있을 때,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갈래래아 전도를 시작하시다(1,14) -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는 주님의 말씀, 처음부터 끝까지 그분의 말씀에서 변함이 없었습니다.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hic et nunc)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며, 회개 곧, 그분께로 나아감을 통해서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기쁜소식이 되고 온전한 ‘의망’으로서 자리잡을 수 있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사명’을 숨기지 않으시고 처음부터 하느님의 복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서 ‘처음과 과정 그리고 끝’까지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와 함께 있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어부 네 사람을 제자로 부르시다 (1.16) -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우리는 제자로 부름을 받은 이들입니다. 그분에게서 ‘배워 익히고 실천하는 이’들이 제자입니다.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은 없습니다. 끊임없이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결과를 통해서 다듬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물고기를 낚는 어부였던 이들을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물고기에서 사람’으로 대상이 바뀌었습니다. ‘대상’을 바꾼다는 것은, 완전히 새롭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새롭게 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삶이 180도 달라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걸 가능하게 하는 것은 다시 태어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곧, 세례이며 우리는 한 번으로 끝나는 세례가 아니라 영원으로 나아가는 세례를 받았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다(1.21) - ‘회당’은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입니다. 그만큼 거룩한 곳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더러운 영’이 있었습니다. 사실 ‘회당’과 ‘더러운 영’은 함께 공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좀더 깊이 생각해보면,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하느님의 거룩한 살아있는 성전인 우리의 마음도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고, 혼란스럽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뽑으시고, 바로 다음 편에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심’을 보여주심으로, 그 누구보다 자비로운 하느님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그럴 수 있다.’라고 하시지만, 결코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며 용납하지 않으심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에게도 그분의 마음과 행실을 적용토록 해야할 것입니다.
시몬의 병든 장모를 고치시다(1.29), 많은 병자를 고치시다(1.32) - 그리스도의 수제자로 불리는 시몬의 ‘장모’가 병이 들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이들에게는 평화만이 가득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가까운 이가 병이 들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의심’하게 됩니다. 사실, ‘의심’은 부정적인 말이지만, 신앙생활에 있어서 ‘의심’은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확실히 알게 되는 과정을 통해서 주님의 전능하심, 곧 하느님의 드러나심을 알게 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특별한 사람만이 아니라, 당신에게 오는 모든 이를 고쳐주십니다. 마귀를 쫓아내시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백성’들을 통해서, 그분을 하느님이라고 고백하는 신앙인들에게만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드러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모습을 닮아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어 오신 주님을 믿고, ‘신앙고백’으로서 매일의 삶에서 그분의 뜻을 이루는 이들이 되어야할 것입니다.
전도 여행을 떠나시다(1.35) -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라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머물러 있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다른 고을들을 제 자신에게 적용시켜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제 눈과 입 귀 머리와 손과 발, 이 모든 곳에 주님의 복음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아름다운 과정을 ‘여행’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먼저, 자신 안에서 ‘그분과 함꼐 하는 아름다운 여행’이 시작되고, 그 여행에 다른 이들을 초대하여 함꼐 아름다운 추억을 쌓는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곳이 곧, ‘복음’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나병환자를 고치시다(1.40) - ‘나병환자’는 가족, 이웃과 친지들, 그리고 사회로부터 ‘격리’되어진 이들입니다. 그런 이들이 주님께 나왔습니다. ‘교회의 문턱이 높아지고 있습니다.’라는 말이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주님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활짝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려고 해야 합니다. 사실,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나와 기댄 이가 새롭게 되어 다시금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라.’라고 하십니다. ‘격리’외었던 이가 그 구속에서 풀어어지고, 자유롭게 된 이는 다시금, 하느님의 백성으로 초대되어집니다. 우리는 그 초대를 준비하고 베푸는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길’을 보여주는 이들이 되고, 손을 내밀어 주님께로 이끌어 주는 사람이 되어 그분이 계신 곳으로 안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어 깨끗하게 하신 주님의 마음을 닮아야 합니다.
중풍 병자를 고치시다(2.1) -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네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주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장면에서, 한 사람의 믿음이 아니라 총 5명 어쩌면 그 이상의 믿음이 필요했는지도 모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믿음이 하느님을 바로 그 자리에 초대한 것입니다.
레위를 부르시고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다(2.13) -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 성경과 교회 전승에 따르면 그는 레위 지파였습니다. 레위 지파는 ‘성전’에서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성전이 아닌 ‘세관’에 앉아 멸시받던 ‘세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를 주님께서 부르시고, 함께 식사하시며, 그들이 새롭게 살아가도록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원래’의 자리에서 ‘새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서 이루시고 싶으신 일입니다.
단식 논쟁-새것과 헌것(2,18) - ‘단식’은 비워짐을 느끼고, 그 공간에 하느님을 채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분에 대한 ‘갈망’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갈망’이 아니라 ‘풍성함’을 느껴야만 하는 순간입니다. 또한, ‘새것과 헌것’도 다르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 있음이 우리를 늘 새로움으로 이끌어 주고 있습니다. 그 새로움을 확실히 즐기는 것, 그분께서 바라시는 일입니다.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다(2.23) - ‘안식일’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하여 ‘쉼’을 주신 날입니다. 아무 것도 안하는 날이 아니라,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을 뵙고, 그분 안에서 채워짐을 받는 날인 것입니다. 주님과 그분의 제자들은 ‘복음’을 선포하시기 위해 ‘밀밭 사이’를 지나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결코 방해 받아서는 안됩니다. 하느님의 법을 왜곡해서는 안됩니다.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시다(3.1) -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육체뿐만 아니라 마음도 서서히 오그라들고 있었을 것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그를 고쳐주시는데, 사람들은 그분을 ‘고발’하려고 지켜 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마치 주인인양 행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주님의 말씀이 그를, 중앙에 놓이게 하였고, 하느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악한 마음을 멈추지 않고, 그분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습니다. 사람을 위한 일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일이고, 사람을 없애려는 일은 ‘더러운 영’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군중이 호숫가로 모여들다(3.7) -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그분께서 우리를 통해서 필요로 하신 것은 ‘믿음’입니다. 그래서 더러운 영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는 소리에 엄하게 이르신 것입니다. 올바른 믿음만이 주님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열두 사도를 뽑으시다(3.13) - 주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사도로 뽑으십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대표적인 장소인 ‘산’에서 당신을 도우고, 앞으로도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이끌 사도들을 뽑으시어 당신의 사랑과 자비가 영원토록 이어지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과 베엘제불(3,20) - 어떻게 하면 ‘주님’과 ‘베엘제불’을 같은 선상에 놓을 수가 있을까? 이 세상에서도 ‘정치’, ‘문화’, ‘경제’, ‘종교’ 양극단으로 치닫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중도’라는 것이 하느님의 뜻인가? 그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있고, 결코 그래서는 안되는 것이 있음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더욱 그래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예수님의 참가족(3.31) - “밖에 서서”,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인륜’을 저버리신 것이 아니라, 당신 주변에 있는 이들이 높이신 것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4.1) -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모두 호숫가 뭍에 그대로 있었다.’라는 표현을 통해서, 그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은 확실합니다. ‘교회’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가 되어야 합니다. 군중이 있었던 자리를 표현한 ‘호숫가 뭍’은 아직까지 진심으로 그분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못함을 보여줍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길,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삶은 다 다를테지만 그들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계신 것입니다.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4.10) - 주님께서는 ‘비유’로서 말씀을 많이 하십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주어졌지만,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비유로만 다가간다.”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회개’로서 시작되어야 하기때문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설명하시다(4.13) - ‘길,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에 대해서 설명하십니다. ‘길’- 주마간산(走馬看山): 달리는 말 위에서 풍경을 본다. ‘돌밭’ - 뿌리를 내릴 여유가 없다. ‘가시덤불’ -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으로 시달린다. ‘좋은 땅’ - ‘말씀을 듣고 받아 드려 열매를 맺는다.’ 주님께서는 모두가 ‘좋은 땅’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분께서도 우리를 이끌어 주시지만, 그분의 제자인 우리도 그분의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등불의 비유(4.21) - 등불은 밝히기 위한 것입니다. ‘숨겨진 것, 감추어진 것 모두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숨겨진 것, 감추어진 것’은 잘잘못을 떠나서 ‘상처’입니다. 그 상처를 돌보시는 분께서 ‘등불’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 속에 있는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메스로 ‘환부’를 ‘절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비슷한 상황에 놓인 이들을 공감하는 것, 그리고 그들이 용기 내어 주님께 나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4.26) -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 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희망과 확신’을 가지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받아들이도록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축복’을 한껏 받아, ‘성장, 변화, 성숙’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겨자씨의 비유(4.30) - ‘하느님의 말씀’은 특별한 때에 우리를 이끌어 주시기도 하지만, 사실은 ‘매일의 말씀’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심을 알고, 그분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데 ‘기쁨’을 누리는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다보면, 주님의 말씀처럼, 자라남을 느끼고, 모든 이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는 변화로 ‘성숙함’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비유를 들어 가르치시다(4.33) -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다.”라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그분의 곁에서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제자’들이 되어야함을 명심하게 됩니다. ‘말씀의 풀이’는 해석하는 능력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풍랑을 가라앉히시다(4.35) -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고물’은 이해하기 쉽게 ‘키’, ‘엔진’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분께서 우리가 가는 방향을 알려주시고, 우리와 함께 ‘교회’안에서 우리를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함께 타고 있는 그 ‘배’에 물이 거의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부르고, 그분과 함께 라면 비록, 세상의 해로움이 우리를 위협할지라도, 우리는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그분께 ‘믿음’을 청하는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마귀들과 돼지 떼(5,1) - ‘마귀들린 이’, ‘마귀들’, ‘돼지 떼’, ‘예수님’, ‘고장 사람들’ 이 복음에서 나타나는 등장 인물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이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기쁜소식을 제대로 전해받지 못하는 이가 있습니다. ‘마귀’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연히 그를 위해서 그가 ‘복음’을 듣고, 그분 말씀 뜻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그 마귀들을 쫓아내십니다. 그리고 그 마귀들을 ‘돼지 떼’에게 보내시어 돼지들이 호수에 빠져 죽게 하십니다. 그 돼지들은 가까운 거리가 아니라 상당히 먼 거리를 뛰어가 호수에 빠져 죽게 됩니다. 주님께서 원하신 것은, 그를 살리시는 것이고, 그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돼지들’(부정적인)에게서 벗어나 확실하게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엄청난 기적을 체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저희 고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하였습니다. 이는, 주님을 통해서 ‘복음’을 받았지만, 기존에 있던 ‘악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때가 아니라 모든 순간을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과 정성, 그리고 실천’을 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하혈하는 부인을 고치시다(5.21) - 야이로는 회당장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가르치는 곳을 관리하는 이였습니다. 그에게 딸이 있었는데, 그 딸이 죽게 되어 주님께 희망을 걸고 그분을 찾아온 것입니다.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라는 회장장의 말을 통해서,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분께서 어떻게 우리를 살리시는지에 대해서 알게 됩니다. ‘믿음’은 ‘초능력’이 아닙니다. 손을 모으고 성호경을 긋고 그분께 기도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면 그분의 거룩한 손이, 그리고 기도를 통해서 얻은 ‘힘과 용기와 기회’로 우리도 역시 그분을 닮아 그분처럼 그에게 손을 댈 수 있게 됩니다. 딸을 살리시려고 가는 도중에 12년 동안 ‘병’에 시달린 여인이 등장합니다. ‘하혈’하는 여인은 완전히 낫지 않고, ‘출혈’이 계속 진행되었습니다. 이는, 신앙인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완전함으로 초대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조금 나아진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여인은 ‘믿음’으로 주님에게서 구원을 얻게 됩니다. ‘믿음’이 그녀를 완전히 살린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회당장의 딸도, 죽음에서 생명으로 일으켜졌습니다.
나자렛에서 무시를 당하시다(6.1) - ‘나자렛’은 주님의 고향입니다. 그곳 사람들은 주님과 동향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어린시절(공생활 전)을 추억하고 있음에도, 그분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함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우리는 이미, 여러 해 동안 신앙인으로서 주님과 함께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복음에서 나온 동향 사람들처럼 주님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함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그저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확실한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이 곧, ‘믿음’입니다.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다(6.7) - ‘권한’, ‘둘씩 짝지어’ 주님께서 주시는 권한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 권한을 행사하는 이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둘씩 짝지어’ 파견하시며 그들이 ‘선’을 지키도록 그리고 본래의 ‘뜻’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마음을 닮아 ‘함께 그리고 선을 지키며’,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다(6.14) - ‘소문’(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말)은, 나의 입으로 옳게 전달되어, ‘믿음’으로 고백하게 되어야 합니다. 헤로데는 그분의 소문을 듣고, 궁금해하거나 의아해하였지만, 결코 ‘믿음’을 고백하지 못하였음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달라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6.17) - 참으로 황망한 죽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오시는 길을 미리 닦아 준비하면서, 모든 이에게 ‘세례 운동’을 펼쳤을 뿐만 아니라 ‘성자’께 세례를 베풀었던 요한은 ‘죽음’을 맞이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이들에게 있어 ‘죽음’은 고귀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그의 죽음은 하느님의 나라에서의 ‘영원함으로의 태어남’이니 우리는 믿음과 희망 그리고 확신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그의 죽음을 가장 슬퍼하시는 분은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천 명을 먹이시다(6.30) - “많은 군중을 모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목자 없는 양들’을 위해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시작’, 주님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 매일의 삶에서 시작하시는 분이십니다. 비록, 우리가 아직 그분의 뜻을 그리고 마음을 잘 헤아리지 못해서 도중에 멈춰지는 일이 많지만, 그분은 우리에게 늘 당신의 거룩한 손을 내미시어 새로운 날을 ‘시작’하십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드시어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을 통해서 나누어 주게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누구이신지 잊지 않으시고, ‘거룩한 제사’를 봉헌하십니다. 또한, 당신과 함께 일하는 이들을 통해서, 그 일을 이어 나가십니다. 많은 이들이 배불리 먹고 열두 남은 것을 모았더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찼습니다. 주님의 가엾은 마음이 모두를 배불리 먹이고도 꽉 차게 하였습니다. 우리도 그 일을 하려고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뽑아 세워주신 이들입니다.
물 위를 걸으시다(6.45) - 물 위를 걸으시어 ‘배’에 있던 제자들에게 다가가신 예수님을 통해서, 그분이 진정 메시아이심을 확신하게 됩니다. 제자들이 ‘배’(교회, 공동체)에 있었지만, 그들은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십니다. 어느 공동체, 집안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용기를 낼 수 있고, 두려움을 떨쳐 버릴 수 있습니다.
겐네사렛에서 병자들을 고치시다(6.53) - 사람들이 그분을 알아보고, 그분이 주님이심을 깨닫고, “두루 뛰어다니며” 그분에게로 아픈 이들을 데려옵니다. 주님을 메시아로 확신하는 이들은 ‘두루 뛰어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합니다. 그것이 곧, 가장 확실하고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렇게 되기를 원하시며, 우리에게 뜬구름 잡는 얘기가 아니라 가장 확실하고 전부인 당신을 걸으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조상들의 전통에 관한 논쟁(7.1) - 조상들의 전통은 중요합니다. 특별히, 손을 씻는 행위, 잔이나 놋그릇 침상을 씻는 일은 ‘건강’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비누’가 발명되어서 인간의 수명이 20년이나 증가하였음을 우리는 명심해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일까요? 그들이, 지금 눈 앞에 있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과거에만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신 모든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완성되는데,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그들이 제대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 있지 않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명심해야 합니다. 또한, ‘사람에게 들어가는 것과,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에 대해 말씀하시며, ‘채움과 비움’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됩니다. 결국, 신앙생활은 주님을 내안에 채우고 자신을 비워냄으로써 그분에게 조금씩 다가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시리아 페니키아 여자의 믿음(7.24) - 그녀는 ‘이교도’였고, ‘이방인’이었지만, ‘주님’을 찾아갑니다. 주님께서는 단호하십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믿음’이 주님을 움직이게 만들었습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치시다(7.31) - 귀가 먹으면 주님의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없습니다. 말을 더듬으면 주님께 ‘찬미의 기도’를 제대로 바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부분을 고쳐주시는 것입니다. 그저 건강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를 고쳐주시는데,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에파타, 곧 열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고쳐주신 그의 출신을 봐야 합니다. 위의 복음과 마찬가지로 이방인입니다. 그가 주님께로 온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행위를 통해서 ‘구원의 확장’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처음부터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으로 뽑아 주신분, 하느님의 모상을 지닌 이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특별한 행위로 그를 통해서 모든 이방인에게도 하느님의 거룩한 뜻이 펼쳐져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천 명을 먹이시다(8.1) -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그분의 가엾은 마음이 놀라운 기적을 일으킵니다. 복음은, 실제로 먹을 것이 없었음을 확실하게 알려줍니다. ‘빵 일곱 개’로 배불리 먹이시고,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받은 사랑과 평화도 나눠진다고 없어 지는게 아닙니다. 오히려 더 풍족하게 남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역시 그분의 마음을 닮아, 아름다운 사람처럼 ‘향기’가 남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향기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이들, 주님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시고, 더 많은 것을 하게 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이 표징을 요구하다(8.11) - ‘믿음’ 아니라 ‘시험’으로써는 그분에게서 얻는 것이 없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믿음’입니다. 바리사이에게 ‘표징’을 보여주셨으면 그들의 마음도, 제자들처럼 돌릴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은 애시당초 성립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은 처음부터 시작된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8.14) - ‘누룩’은 빵이나 술을 만들때 없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누룩’은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 아닌, ‘조상들의 전통에 관한 논쟁’에서 나온, 사람에게서 나온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그를 악으로 물들게 하고, 자신 뿐만 아니라 그가 속한 공동체를 병들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것이 아닌, 하느님에게서 받은 것으로 자신을 ‘변화시키고 성장하며 성숙함’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분에게서 우리에게 베푸신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입니다.
벳사이다의 눈먼 이를 고치시다(8.22) - 눈먼 이의 손을 잡아 그를 앞장 서서 이끄신 다음,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셨다. “무엇이 보이느냐?” 그러나 그 눈먼 이는 흐릿하게 봅니다. 다시금 주님께서 손을 얹으시니 똑똑히 보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주님께서는 사람을 향한 사랑은 이어져야 함을 보여줍니다. 주님이시지만, 우리에게 일부러 그가 나을 때까지 그에게 손을 얹으시는 모습을 보여주심으로써 우리도 그 마음을 닮도록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다(8.27) -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 제우스 신전, 아우구스티누스 황제 신전, 님프의 신전이 있는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마시는 식수가 이곳에서부터 터져나옵니다. 바로 그곳에서 주님께서는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믿음’, ‘사회적 영향’, ‘관심’ 모두 하느님이 우선되도록 신앙을 고백하며 청해야 합니다.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시다(8.31) -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한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를 진정으로 ‘사탄’으로 여기신 것이 아니라 사도들의 대표인 베드로를 통해서 모든 이가 귀담아 들을수록 하신 것입니다. 당신을 따르는 이들을 더욱 강하게 키우십니다. 온전히 모든 것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8.34) -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사실, 십자가는 ‘본인’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버려야 합니다. 역설적인 말이지만, 이미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새로 태어나는 세례를 통해서, 자신을 버리고 그분께서 주신 새로운 이름으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합당하지 못하는 것들을 과감하게 버리고, 그분께 합당한 것을 키워나가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곧, 본인인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다(9.2) - ‘엘리야, 모세, 예수님’ ‘초막 셋’ 주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신 까닭은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신 뒤, 그들이 받을 상을 보여주시며, 그들을 다독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여기까지!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주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받은 세례 때의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목소리가 들려온 것입니다. 지금은 멈출 때가 아니라 나아갈 때입니다.
엘리야의 재림(9.11) - ‘엘리야’는 이름처럼 “나의 하느님은 야훼”이심을 분명히 드러낸 이였습니다. 이름을 드러낸다는 것은 그 이름처럼 살아갔음을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있음을, 한 분이신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 이 모두는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완전하신 하느님의 뜻인 예수님의 뜻을 이루시려고 엘리야는 그분보다 먼저 그분의 길을 닦기 위해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어떤 아이에게서 더러운 영을 내쫓으시다(9.14) - 이 복음은 확실하고 단호하게 요구하신 주님이 잘 드러납니다.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또한, 더러운 영을 쫓아내지 못한 제자들에게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를 통해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오셨고, 우리를 살리러 오신 주님께 ‘희망과 확신 그리고 믿음’을 두는 것만이 그분의 뜻을 이루는 일임이 분명해졌습니다.
수난과 부활을 두 번째로 예고하시다(9.30) - 누구에게도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지만,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두 번째로 수난과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가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라고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다른 이들이 아닌,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전해주시면서, 당신의 아픔과 영광을 공유하고 싶으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우리의 삶을 그분과 함께 나누는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가장 큰 사람(9.33) -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지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가르치고, 섬겨 이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에서도, 당신과 같은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도록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어린이 하나’ 가장 약한 이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이는 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지지하는 사람이다(9.38) -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 그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꼭 천주교여야만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일은 주님의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관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우리가 걷고 있는 올바른 길에 놓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죄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쳐라(9.42) - ‘단호함’을 요구하시는 주님, 죄를 지어서 눈을 빼버리고 손과 발을 자르면 누가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시며, 우리가 결코 죄에 빠지지 않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직도 그분께 배울게 많고, 얻을 것이 많음을 알고, 부모의 바짓가랑이를 잡은 아이처럼 그분을 꼭 붙들고 있어야 합니다.
소금(9.49) - ‘소금’은 음식의 맛을 살리며, 썩지 않게 하고, 예로부터 부정을 쫓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소금은 ‘바닷물’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 지구의 70%이상을 차지하는 바닷물, 곧 하느님의 크신 사랑에 머물러 있는 이들이 올바른 ‘소금’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혼인과 이혼(10.1) - “모세는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 그것은 누가 모세에게 전해준 것이냐? 라는 물음에서 당연히 답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혼인과 이혼’은 사람에 관한 말씀만이 아닌 것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며, “그분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라는 말씀처럼, 주님의 뜻에 맞게 사는 것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을 사랑하시다(10.13) -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어린이는 혼자서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자기보다 나은 사람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아직 덜 성숙하기 때문에 자신이 의지하는 사람의 모든 것을 스폰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받아들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께 의지하고 그분의 모든 것을 습득하려는 이에게 열려 있음을 우리는 명심해야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와 부자(10.17) -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어렵다와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말씀의 대비는 우리가 의지할 것이 바로 주님의 ‘전능하심’임을 깨닫게 됩니다. 낙타는 실제로 거대한 동물입니다. 부자는 돈이 많은 사람입니다.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 특히, 돈에만 정신이 팔려 그것을 모으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고, 자신을 줄이지 않고 계속해서 커져만 간다면, 하느님의 나라에는 합당하지 않는 이가 될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자신을 계속해서 그분에게 맞춰가는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따름과 보상(10.28) - 그분을 따름으로써 모든 이를 섬기게 되었고, 깊은 관계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주님 말씀대로 ‘형제나 자매, 어머니와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백 배’ 넘게 받게 되었습니다. 물론, 세상의 법칙으로 완전한 내 소유가 아닌 우리의 소유가 되었지만, 그만큼 하느님의 나라에 가까워질 수 있음을 우리는 이미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이룰 때까지, ‘친교와 자선’을 이루는데 게을러서는 안될 것입니다.
수난과 부활을 세 번째로 예고하시다(10.32) -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 제자들 앞에 서서 그분께서 걸어가십니다. 그분의 뒤를 따르는 이들은 두려워하였다고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가장 앞선 이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이가 제일 두렵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해서, 그리고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위하여 앞에 서서 걸어가십니다. 그리고 열두 제자에게 세 번째로 수난과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감정을 떨쳐내시고, 끝까지 모든 일을 완수하시기 위해서 하느님의 일을 이어가십니다.
출세와 섬김(10.35) - 수난과 부활에 대한 세 번째 예고 뒤에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이해하시고, “정해진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다시금 그들에게 설명해 주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라고 확실히 말씀해 주십니다.
예리코에서 눈먼 이를 고치시다(10.46) - 주님께서는 예리코를 떠나실 때,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를 만나십니다. 그리고 그는 ‘믿음’으로 주님을 부릅니다. 아니 외칩니다. 그의 믿음이 주님의 걸음을 멈추게 하였고, ‘그를 불러오너라.’라는 말씀으로 ‘만남’이 시작되었습니다.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라는 바르티매오의 말에 주님께서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시며, 그를 낫게 하실 뿐만 아니라 그에게서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서 ‘거룩한 뜻’을 이룰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다(11.1) -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우리는 이날에 이 말씀을 읽고, 성지 가지를 들고 사제가 뿌리는 ‘성수’를 받습니다. 또한,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 받으소서. 높은 데서 호산나!”라고 노래부릅니다. 그분의 예루살렘 입성은 ‘왕의 행차’와도 같습니다. 열렬한 환호 속에서 그분은 예루살렘으로 오십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왕처럼, 화려하지 않습니다. 어린 나귀 한 마리를 타고 하느님의 집으로 들어가십니다. 예루살렘 입성은 주님께서 ‘하느님의 집’에서 모든 일을 완성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을 둘러보신 뒤 베타니아로 나가십니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다(11.12) -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 ‘철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나무는 열매를 맺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나무를 저주하십니다. 이 복음은 사뭇 이해가 되지 않게 느껴지지만, 주님과 함께 지내오면서 우리는 참으로 그분께 많이 청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우리의 완전한 때를 위해서 마련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게도 내가 필요할 때, 언제고 그분께 청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정말 필요할 때 자신의 시간이 아니라고 ‘열매’를 내놓지 못하는 것은 ‘지금의 나’임을 깨닫게 됩니다.
성전을 정화하시다(11.15) - 주님께서는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라는 주님의 말씀은, 가히 주님의 아픈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성전’은 거룩한 곳입니다. 그곳에 들어서면 그 거룩함으로 몸이 짓눌릴 만큼의 느낌을 받아야 하는 곳입니다. 그런데도 그 거룩한 곳은 서서히 본래의 것에서 벗어나, 주님께서 쫓아내고 둘러엎으셔야만 했습니다. 다독임으로 되지 않으면, 그럴 수밖에 없어집니다.
말라 버린 무화과나무의 교훈(11.20) - “하느님을 믿어라.” “마음 속으로 의심하지 않고 자기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으면, 그대로 될 것이다.” 이 두 말씀은 우리를 ‘완전함’으로 이끌어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을 통하여 그분께로 나아감이며, 생각과 말과 행동을 닮게되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마음 속으로 의심하지 않는 것은 내 안에 다른 것, 곧 부정이 자리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그밖의 것으로 혼합되어 그 ‘순수함’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끝까지 그 ‘가능성’을 열어 보이시고, 진정한 평화가 축복으로 우리를 초대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뜻에 맞게, 제때에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는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과 은총으로 말라 버리지 않고, 그 생명력이 충만한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권한을 문제 삼다(11.27) - ‘권한’은 하느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에게 모든 것을 맡기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권한’은 하느님과 일치합니다. ‘수석 사제들, 율법 학자, 원로들’이 ‘문제’를 삼을만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도 더 이상 그들과 말씀을 나누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12살이 되던 해, 예루살렘에서 말씀을 나누었던 이들은 그곳에 남아있지 않았음을 느끼게 됩니다. ‘경탄’하며 소년 예수님과 말씀을 나누었던 이들, 어쩌면 시간이 지나 그 사람, 그대로 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모두 주님의 마음을 슬프게할 뿐입니다.
포도밭의 소작인의 비유(12.1) - 포도밭은 ‘세상’이고, 주인은 ‘하느님’이시며, 소작인은 ‘세상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 사람’에게 당신의 나라를 맡기셨는데, 그들에게 당신의 종들, ‘예언자, 그리고 예수님’을 보냈지만,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해야할 것은 ‘귀 있는 사람’으로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예언자, 예수님’을 통해서 받은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면서 모든 이가 그분의 뜻을 받아들이고 포도밭에서 나오는 수확물로 모든 이를 ‘성화’시키는 포도주를 빚어내야 합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문제(12.13) -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법을 확실하게 지키고, 참여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문제뿐만 아니라, 하느님에 대해서도 확실한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세상 문제에는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적극적인 이들이 하느님에 관하여는 뜨뜻미지근한 이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부활 논쟁(12.18) - 사두가이파는 제사장,귀족 중심이고, 모세오경, 곧 토라만 인정하며 부활,천사에 대한 믿음에 부정적이며,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들의 계층이 당시 ‘지배계층’이었고, 성전을 관리하는 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입니다. ‘권력’이 그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아니라 ‘권력’에 물들어 가고 있는 그들에게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라고 말씀하시며,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나를 이끌어 주시는 분이시지만, 우리를 너무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아드님을 통하여 거룩함으로 초대해 주신 분이십니다. 그러니 우리의 삶은 영원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하느님은 영원한 우리의 하느님이 되시는 분이시기에, 우리가 결코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 삶을 살아가기에 ‘산 이들의 하느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가장 큰 계명(12.28) -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말 그대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움직이게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것을 계명이라고 하셨고, 계명은 하느님과 나의 약속이며, 지키는 것입니다. 혼자가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모두가 함께 지켜나갈 때 더 큰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며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12.35) -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미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시는 분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오시기 위하여 ‘다윗의 자손’으로 ‘성모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오신 분이십니다. 이 말씀은 그분께서 참 사람이요 참 하느님이심을 드러내는 말씀인 것입니다.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12.38) - ‘인사받기를 즐기고 높은 자리를, 윗자리를 즐기며,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겸손’하지 못한 ‘신앙’은 없습니다. 그런데 ‘겸손’이 ‘약한 모습’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진정한 겸손’은 정말 강합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하느님에게서 채우려고 하는 이들이며 끊임없이 ‘기도’하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율법 학자는 다 아는 이들입니다. 하느님의 말씀도,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도 다 안다고 떠드는 이들입니다. 그런 사람은 결코 ‘겸손’을 이룰 수 없습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12.41) - ‘헌금’은 ‘봉헌’입니다. 헌(獻:바치다)과 헌(舊:옛)의 구분이 확실하게 필요합니다. 과연 우리는 진정으로 ‘봉헌’하고 있는지, 아니면 지갑에서 옛것을 꺼내어 바치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교회의 성장은, ‘바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며, 자신에게 별로 쓸모없는 옛것을 ‘냄’으로써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시다(13.1) - “너는 이 웅장한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하느님이 계시기에 ‘성전’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이 아니라 ‘건물’을, 웅장한 ‘건물’에만 시선이 팔려 있습니다. 그러한 것은 결국 허물어지게 될 것입니다.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은 ‘화려함’이 끝나는 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런데 ‘화려함’이 끝난 후 ‘고귀함’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그것은 바로, 주님의 있고 없음의 차이입니다.
재난의 시작(13.3) - 스스로 구원자라 여기며 많은 이들을 현혹하는 이, 탐욕으로 다른 나라를 공격하여 땅과 바다를 피로 물들게 하는 이들, 지진과 기근 생각만 해도 어지럽지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주님께서는 ‘진통의 시작’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진통’에서 정신을 부여잡고 있을 수 있으려면, 주님에 대한 ‘희망과 확신’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조심하여라.’ ‘걱정하지 마라.’ ‘성령께서 함께 하실 것이다.’ “끝까지 견디어 내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혼자가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성령’과 함께,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이들과 함께, 우리에게 오시어 하느님의 나라를 보여주신 ‘주님’과 함께 이 모든 것을 마련하신 ‘하느님’과 함께 우리는 나아가야 합니다.
가장 큰 재난(13.14) -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환난이 우리에게 닥쳤을 때, 우리가 의지해야할 분이 분명해집니다. 그때가 되었을 때 우리가 주저하지 않고 확실히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도록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는, 하느님과 온전히 하나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은 ‘기도’ ‘말씀’ ‘미사’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 힘은 함께할때 더욱 강해집니다.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13.24) -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땅 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라는 말씀으로, 우리는 그분의 선택으로 이미 이 세상에서 뽑아 세워진 이들로서, 결코 다른 것에 흔들리거나 부러지지 않도록 서로가 함께 굳세어져야 합니다.
무화과나무의 교훈(13.28) - 하느님의 피조물이 제 때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처럼, 우리를 위하여 마련하신 ‘회개와 축복’의 시간에서 우리는 그분께서 베풀어주시는 ‘사랑과 은총’을 충만히 받아 주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것을 드러낼 수 있는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우리’에게 ‘모두’에게 이 일을 하시러 오셨습니다.
깨어 있어라(13.32) - ‘깨어 있음’은 우리가 받은 ‘권한’이 무엇인지 알고, 그 ‘권한’을 사용하며, 주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깨어 있음’은 옆에 있는 이를 함께 깨우고, 보지 못했던 새로운 것을 느끼게 하며, 더욱 힘차게 나아가게 합니다.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다(14.1) - 이제 비로소, 마르코 복음의 후반부에 이르렀습니다. 그분의 죽음에 대한 음모가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지독한 어둠이 우리를 ‘암흑’에 가둬두려고 하고 있습니다.
어떤 여자가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다(14.3) - ‘베타니아’는 주님께서 몸과 마음을 편히 쉬는 곳입니다. 거기에서 ‘라자로’를 살리시기도 하였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주님의 ‘죽음’을 준비하는 예식이 시작됩니다. ‘나르드 향유’, ‘삼백 데나리온’, 값비싼 향유를 그분 머리에 부어 그분의 장례를 준비합니다. 삼백 데나리온은 노동자가 1년동안 벌어야할 엄청난 돈입니다. 그저 ‘돈’이 아니라 매일의 삶에서 하느님께 봉헌된 시간입니다. 우리도 역시 매일의 삶이 모인 ‘전례력’에 참여하며, 주님의 죽음을 모두와 함께 준비하는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다(14.10) - 열두 제자 중에 하나 ‘유다’, 주님과 함께 모든 일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았던 그가 ‘돈’때문에 주님을 배신합니다. 다른 이유를 댈 수도 있겠지만, 복음은 ‘돈’이라고 확실히 말하고 있습니다.
최후의 만찬을 준비하다(14.12) - 예루살렘을 입성하시던 그때처럼, 당신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십니다. 이는, 그 거룩한 때에 ‘평범’한 사람도 참여할 수 있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곧, 그분의 ‘겸손’입니다. 무교절 첫날 곧 파스카 양을 잡는 날, 제자들과 함께 드실 음식이 차려집니다.
제자가 배신할 것을 예고하시다(14.17)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 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저는 아니겠지요?” 12제자 모두, 아직까지 ‘확신’이 없었습니다. ‘상황’이 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행하여라’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불안감이 우리를 사로잡지 못하도록 그분께 ‘희망’을 청하는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찬례를 제정하시다(14.22) -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스스로 하느님의 어린양이 되어 오신 주님께서는 ‘성찬례’를 제정하시며 모든 이를 ‘하느님과 맺는 거룩한 계약’으로 초대하십니다.
베드로가 당신을 모른다고 할 것을 예고하시다(14.27) - “오늘 이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닭은 새벽을 깨우는 동물입니다. 어둠이 지나가고 여명이 밝아 오는 시간입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그 순간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임을 예고하였습니다. 아직까지 그들이 ‘빛’으로 나오지 못하고, ‘어둠’속에 사로잡혀 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가엾게 여기시어 미리 말씀해 주시며 그를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시다(14.32) - 예루살렘 동쪽 올리브 산기슭에 있는 곳, 예루살렘을 비추는 태양이 떠오르는 곳, 그곳에서 주님께서는 하느님께 기도하십니다. 비록, 자신의 죽음을 피할 수는 없지만, 매일 새롭게 떠오르는 태양처럼 그들을 환히 비추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중요한 순간마다 함께 하셨던 제자들을 데리고 가시어, 죽음으로 피폐해진 당신의 영혼이 위로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라며 안타까워하십니다. “일어나 가자. 보라 나를 팔아넘길 자가 가까이 왔다.”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을 때부터 그분께서는 앞장 서서 가십니다.
잡히시다(14.43) - 유다의 인사와 입맞춤, “스승님” 그분을 배신했던 그 입으로 주님께 입을 맞추면서 인사합니다. 주님께서 모르시지 않으셨지만, 당신의 제자였던 유다의 입맞춤을 받아주십니다. 마지막 인사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다.’ 주님 주변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오직 그를 죽이려는 이들만이 있었다.
알몸으로 달아난 젊은이(14.51) - ‘알몸’에 ‘아마포’만 두른 채 그분을 따라갔지만, 두려움으로 붙잡히게 되자, 아마포를 버리고 알몸으로 달아났다. 얼마나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그 상황이 얼마나 긴박했는지, 그리고 공포감에 휩싸였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최고 의회에서 신문을 받으시다(14.53) - ‘수석 사제들, 원로들, 율법학자들’이 모두 모여왔지만, 그분에게서 ‘사형’에 대한 증언을 찾아내지 못하였습니다. 거짓 증언에는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지만, ‘메시아’에 대한 질문에는 입을 여시어 말씀하십니다. “그렇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이 저능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예수님을 조롱하다(14.65) - “알아맞혀 보아라.” 분명 당신께서 ‘메시아’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주님을 조롱하였습니다. 같은 말을 들어도, 그들에게 ‘믿음’이 없기 때문에,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다(14.66) - “나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겠소.”, “부인하였다.”,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점진적으로 ‘애매모호’에서 ‘확실’하게 주님을 부인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빌라도에게 신문을 받으시다(15.1) - 빌라도는 로마에서 파견된 집정관입니다. 그에게서 “당신은 유다인들의 임금이오.”라는 질문을 들으십니다. ‘유다인들의 임금’은 ‘로마’에 대항해 ‘반란’의 우두머리라는 표현입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빌라도의 눈에는 ‘반란군의 수장’이고, 신앙인에게 주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더 이상 대답할 필요가 없으신 것입니다.
사형 선고를 받으시다(15.6) - ‘바라빠’가 ‘주님’보다 더 매력적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는 와중에 ‘반란’을 일으킨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수석사제들이 ‘주님’이 아닌 ‘바라빠’를 풀어달라고 군중을 부추겼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군중의 마음이 아니라 빌라도를 압박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거듭 소리를 지르고 더욱 큰 소리로 외칩니다.
군사들이 예수님을 조롱하다(15.16) - ‘그들은 온 부대를 집합’시킨 다음, 자주색 옷과 가시관을 씌우시고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하며 조롱하였다, ‘자주색 옷’은 권력을 상징하기에 더 치욕스럽게 느껴집니다. 가시로 엮은 왕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당신을 박해하는 이들의 입에서도, 사형 선고를 내린 빌라도에게서도 당신이 ‘왕’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다(15.21) - ‘십자가의 길’, ‘시몬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주님’ 그분의 마지막까지, 도움을 받으시며, 주님께서 함께 이루실 일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많은 이들의 모욕을 받으시지만, 그들의 말이 성경에 남도록 하시어, 당신이 이루신 일과 앞으로 이루실 일을 보여주셨습니다.
숨을 거두시다(15.33) -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예수님을 마주 보고 서 있던 백인대장’이 고백합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라는 백인대장을 통해서, 모든 이의 입에서 나올 ‘신앙고백’으로 그분은 철저하게 이 세상에서 버림받으셨지만, 당신께서 이루실 일에 대한 ‘증언’을 남겨두셨습니다. 그리고 사회적 약자인 여성들이 그분의 죽음과 함께 하고 있음을 성경은 전하고 있습니다.
묻히시다(15.42) -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 빌라도에게 당당히 들어가’ 주님의 시신을 모시게 됩니다. 그는 ‘하느님의 나라’를 열심히 기다린 이였습니다. 비록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막혀 돌아가셨지만, 그분께서 이 세상에 뿌리신 씨앗이 그 뿌리를 곧게 내리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부활하시다(16.1) - ‘주간 첫날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 이 세상의 새로운 날의 태양이 떠오를 때, 두 여인은 주님의 무덤에서 천사를 만납니다. 주님의 무덤을 막고 있었던 돌은 ‘매우 큰 돌’이어서 죽음과 이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단절을 상징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살리시고, 두 여인은 천사에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거기에서 뵙게 될 것이다.”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새롭게 시작되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다(16.9) - 무덤에 가서 향료를 발라 드리려고 했던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 나타나시고 여인을 통해서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전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듣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다(16.12) - 시골(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는데, 다른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에게 드러내셨고, 그들은 다른 제자들에게 알렸지만 실제로 보았던 그들의 말도 믿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다(16.14) -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당신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셨던 모든 것을 그들에게 이르십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이제는 사도들이 교회를 이끌어 나갈 차례가 된 것입니다.
승천하시다(16.19) -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오르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십니다. 이 세상에 오시어 하느님의 모든 계획을 완수하시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도 역시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마련하신 그 자리로 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와 함께’ 하시며,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심을 믿고,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해야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