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임신부님 강론
2020년 12월 23일 대림 제4주간 수요일
- 등록일
- 2020-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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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즈카르야가 아니라 요한이라는 이름을 지어야 하는 이유를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복음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먼저 엘리사벳이란 이름의 의미는 ‘나의 하느님이 맹세하시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뜻은 ‘주님께서 기억하신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즈카르야 집안에 없었던 이름, 요한은 ‘자비로우신 주님(야훼)‘이라는 뜻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 세 이름의 뜻을 묵상하면서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이란 이름과 요한이라는 이름 안에 담겨 있는 차별성을 바라보게 되었고, 이러한 차별성 때문에 주님께서는 요한이라는 그 집안에서는 다소 쌩뚱맞은 이름을 선물하셨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차별성은 바로 우리 밖에 계신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이심을 이름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곧 맹세하시고, 기억하시는 하느님은 우리와 동행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주위에 계시며 약속을 전해주시고, 우리의 삶을 기억해주시는 분이신데 반해, 자비는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감싸주시며, 우리를 보호해주시는 분이심을 전하는 것이라 느껴집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느님께서는 요한이라는 이름을 통해 자비가 우리 삶 안으로 다가올 것을 미리 알려주시려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저 갑자기 하늘에서 ‘툭!’ 하고 내려오게 하지 않으시고 우리 앞을 미리 밝혀주시려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하느님의 약속으로만 알고 있었던, 하느님께서 우리의 불쌍함을 기억하신다고 알고 있었던 것을 넘어 자비로 우리에게 다가오시어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해주셨다는 것, 머리속이 아니라 체험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신 것임도 함께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오신 분이 상상으로, 생각으로, 기억으로 우리 주변에 머물고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 곁에, 우리 안에 함께 하시는 분이심을 다시 바라볼 수 있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이미 오셨지만, 이제 곧 다시 오실 그분께서 자비로 우리 곁에 자리하실 수 있도록 그분의 자리를 마련하는 우리 본당의 모든 분들이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