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임신부님 강론

2021년 8월 4일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등록일
2021-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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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미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마태오복음 11장에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가셨던 티로와 시돈은 지금으로 따지면 레바논에 있는 항구도시로 지중해를 끼고 있는 이방인들의 지역이었습니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던 마태오복음 11장의 말씀은 코라진과 벳사이다라는 유다인들의 도시에서 행하신 기적들을 이방인들의 도시에서 행했다면 그들은 회개를 하였을 것이라는 한탄의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티로와 시돈에선 회개의 외침을 선포하지 않으셨음을 의미한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 말씀과 11장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티로와 시돈 지방이라는 이방인들의 도시에는 왜 굳이 가셨는지를 질문해보게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회개를 위해 방방곡곡을 다니시는데도 바쁘셨을텐데, 그리고 그곳에서 회개를 외치실 것도 아니셨는데, 게다가 당신의 사명이 미치지 않는 곳인데 왜 그곳을 향하셨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을 이어가다 문득, 제가 한 질문 안에 제가 예수님을 규정하고, 묶어버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질문 안에, 그리고 제 생각 안에, 예수님은 당신의 필요를 위해서만 무엇인가를 한다는 생각이 담겨 있음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경계가 없고, 한계가 없는 분을 제 스스로 규정하면서, 그분께서는 그러셔야 한다고, 저도 모르게 그분을 묶어버리며 그 안에서 혼자만의 희열을 느끼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를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가나안 여인이 주님 사명의 껍질을 깨는 응답을 했던 것처럼, 오늘 말씀은 저의 생각이라는, 제 자신이라는 껍질을 깰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망치와 같은 말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의 고정관념이 묶어버린 예수님을, 저의 굳어버린 생각이 규정해버린 하느님을 풀어드리고 놓아드리도록 만들어준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그러므로 규정되지 않는 분을 규정하려는 우리의 생각과, 묶이지 않는 분을 묶으려 하는 우리의 마음을 점검하면서, 그분께 자유를 드리고, 우리 또한 주님께서 원하시는 생각과 마음의 해방을 찾아가는 신앙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언제나 뛰어넘으시고 초월하시는 그분 앞에 겸손함 또한 잊지 않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