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보성인
성인은 ‘파도바의 안토니오’라는 호칭과 달리 포르투갈 리스본의 귀족가문에서 태어났다. 이탈리아의 ‘파도바’는 성인이 활동한 곳이다. 103위 성인 중 외국인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서 활동하다 순교했기에 우리나라의 성인이듯, 안토니오 성인이 파도바에서 활동하고 또 묻혔기 때문에 ‘파도바의 안토니오’라고 불린다.
성인은 15세 되던 해에 집 근처의 아우구스티노 참사 수도회에 입회했다. 그러나 자신을 찾아오는 친구와 친척을 피해 포르투갈 코임브라의 성 십자가 참사 수도회로 옮겨 공부와 기도에 전념하다 1219년 사제로 서품됐다. 성인은 모로코에서 순교한 작은 형제회 순교자들의 유해를 만나고 순교자가 되고자하는 열망에 사로잡혀 아프리카를 향했으나, 병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다.
성인이 설교가로서 유명해지기 시작한 것은 1221년의 일이다. 성인은 사제 서품식에 참석하기 위해 포를리를 찾았는데 마침 미사에서 강론할 마땅한 사람이 없어 성인이 강론을 맡게 됐다. 여기서 성인은 설교의 재능을 높이 평가 받았다.
성인은 설교가로서 북부 이탈리아와 남부 프랑스에 파견됐다. 각 지역에는 카타리파와 알비파라는 이단이 성행하고 있었는데, 성인의 뛰어난 설교로 선교에 놀라운 성공을 거두게 됐다. 성인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뤘고, 특히 사람들을 개종시키고 고해성사를 주는 신부로서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성인은 작은형제회의 첫 번째 신학교수로 임명됐지만, 설교직에 헌신하기 위해 공적인 직책을 사양하기도 했다. 또 성인은 1227년 에밀리아 관구의 관구장 대리로 선출됐지만, 1230년 설교에 전념하고자 사임하고 파도바 수도원에 정착했다. 성인은 파도바에 머물면서 파도바 전체를 완전히 개종시켰다.
성인은 소외된 이, 가난한 이를 돕는 활동에 몸 바쳤다. 성인은 채무자와 억울하게 갇힌 사람들을 풀어주는 활동을 펼쳤고, 일생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했다. 이런 성인의 이름을 따서 19세기 ‘안토니오 성인의 빵’이라는 구호단체가 설립됐고 개발도상국의 가난한 이들을 위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성인은 병에 걸려 캄포 산 피에로에서 요양을 하다 파도바로 돌아오던 중 아르첼라에 있는 클라라수녀회에서 선종했다. 이때 성인의 나이는 불과 36세였다. 성인은 이례적으로 선종 이듬해인 1232년 시성됐다. 또 1946년에는 비오 12세 교황이 성인을 교회학자, 복음적인 박사로 선언하기도 했다.
성인이 활동할 당시 사람들을 성인을 ‘이단자들을 부수는 망치’, ‘살아있는 계약의 궤’라고 불렀다. 또 성인이 행한 기적 이야기가 널리 퍼져있었다. 성인에 관한 기적은 성인의 죽음 이후에도 많았는데, 17세기부터는 잃어버린 물건을 찾을 때 성인에게 전구를 청하면 찾을 수 있다는 전설도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