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지오 훈화
연중 제25주간/3. 신비체 안에서 겪는 고통
- 등록일
- 2024-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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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신비체 안에서 겪는 고통
레지와 단원들은 초창기부터 불우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 봉사하기 위해 방문 활동을 실시하였다. 첫 회합에서 결정된 방문 대상은 구호 병원의 환자들이었다. 단원들은 각 병동마다 두 사람씩 배정되었다. 그러나 암 병동 배정에 있어서는 놀랍게도 서로 자기네가 맡겠다고 지원하였다. 오늘날엔 레지오가 궂은 일에 단련되어 있어서 그러한 방문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겠지만 그 당시만 해도 그런 일은 매우 드물었다. 그리고 암 병동은 극빈자들이 경제 사정으로 미리 손을 쓰지 못해 하나같이 중환자들이었기에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런데 단원들은 공포를 극복하면서 기꺼이 힘든 봉사 활동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프랭크 더프에게 신앙의 시금석이 된 것은 그리스도의 신비체 진리에 대한 터득이었다. 그에게 모든 불우한 사람은 모습을 바꾸신 그리스도였다. 그는 레지오 단원들이 모든 사람 안에서 사랑하는 주님을 뵙고 아울러 모든 임무를 성모 마리아와 일치하면서 주님께 봉사하는 것이 레지오 마리애의 정신이라고 하였다.
프랭크 더프는 고통 받고 가난하고 소외 당한 사람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 봉사하는 것은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 특권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레지오 사업으로서 신비체 안에서 고통 받는 윤락녀들과 집 없는 부랑 남자들, 그리고 미혼모들을 위한 숙박소를 운영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업은 다음과 같은 계기로 이루어진 것이다.
1920년대에는 대규모의 매춘이 성행하고 있어서 큰 문제였다. 프랭크 더프는 뱀을 짓밟고 악의 세력을 물리치는 원죄 없으신 성모님의 도움을 확신하면서 매춘 문제에 도전하였다. 그는 1922년 7월에 윤락녀들이 회개하여 새 삶을 찾을 수 있도록 2 박 3 일간의 주말 봉쇄 피정을 마련하였다. 우여곡절을 겪은 후 24 명이 참석한 피정은 대성공이었다. 피정이 끝날 무렵 더블린 시청으로부터, 회개한 윤락녀들이 새로이 거처할 건물을 제공받았다. 그 건물을 '성 마리아 숙박소'라고 불렀다. 그 후에 여려 차례에 걸쳐 실시된 피정도 성공하여 그 기숙사에서 새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또한 그 당시 집 없이 거리에서 방황하는 부랑 남자들을 위한 숙박소 마련이 시급하였는데 이번에도 시청에서 프랭크 더프에게 건물을 제공하였다. 그 건물은 '샛별 숙박소'라는 이름으로 1927년 3월에 문을 열었다. 3년 후인 1930년에는 샛별 숙박소 가까이에 미혼모와 집 없는 극빈 여성들을 위한 건물도 마련되었는데 그것을 '천상의 모후 숙박소'라고 불렀다.
레지오 단원들은 봉사 활동으로써 고통 받는 사람들과 잦은 접촉을 하게 되므로 고통의 의미에 대해 깊이 알아두어야 한다. 그러기에 레지오 단원들은 고통의 의미를 잘 깨달아 고통 받는 신비체의 지체들을 위로하고 격려해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고통은 은총이 되고 전화위복이 될 것이다.
신비체 안에서 겪는 고통에 대해 설명한 교본 본문을 요약해 보자 : 고통은 인생의 길을 가로막고 방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고통이야말로 인생을 완성시키는 구실을 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성서의 여러 곳에서 가르쳐 주고 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필리 1, 29
"이 말은 확실합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우리가 견디어 내면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이며 우리가 그분을 모른다고 하면 그분도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2디모 2, 11-12
십자가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순간을 표상한다. 우리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흘린 예수님의 고귀한 성혈은 신비체를 통해 미세한 부분에까지 전달됨으로써 영혼들을 그리스도와 닮게 해 준다.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면만 빼내어 고를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과 성모님의 성심처럼 환회와 영광뿐 아니라 고통도 받아들여야 한다. 비통의 인간으로서 그리스도와 나란히 걷지 못하는 사람은 영혼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명에 아무 구실을 할 수 없다. 고통은 단순히 죄에 대한 벌이 아니며 치유와 힘을 주고 그리스도를 닮게 해 준다. 고통의 의미를 터득하면 그 고통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