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전례/기도

3월 26일 사순 제4주간 목요일

등록일
2020-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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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론 0326.hwp

요즘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회칙인 ‘복음의 기쁨’을 다시 읽고 있습니다. 요즘 ‘복음이 정말로 우리에게 기쁜 소식인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불확실성과 불안감이 큰 요즘, 또 슬프고 비장한 소식들 투성인 세상에서, 정말로 복음을 통해서 기쁨을 얻을 수 있을까요? 실제로 코로나 때문에 실질적인 고통을 겪고 있는 형제, 자매님들께 그리스도의 복음은 기쁨으로 다가오고 있나요?

회칙은 말합니다. ‘실재가 생각보다 더 중요하다.’ 즉, 말만 앞세우거나 이미지로 현혹하려한다면, 아니면 궤변으로 현실을 포장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보다는 지금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천사같은 순수주의, 상대주의의 독재, 공허한 미사여구, 현실과 동떨어진 목표, 선의가 없는 도덕주의, 지혜가 없는 지성주의도 모두 거부되어야 한다고 회칙은 말합니다.(231항 참조) “복음의 충만함은 학자, 노동자, 기업가, 예술가와 모든 사람을 묶어줍니다. 기쁜 소식은 작은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지 않고자 하시는 아버지의 기쁨입니다. 인간의 모든 차원을 치유하고 열매 맺을 때까지, 언제나 기쁜 소식으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듣는 복음이 만약 현실성 없는 단순히 착한 말뿐이라면, 오히려 공허하고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네 삶을 정확히 인지하고 우리의 복음을 듣고 살아낸다면 그곳이야 말로 하느님 나라요,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혼인잔치일 것이라고 교황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요한을 가리켜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이라고 말하죠. 예수님의 표현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공감은 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며, 몇몇 사람들에게만 유보되어있다고 믿어진 구원을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극기와 절제를 통해 하느님 나라가 미래에 다가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더 적극적인 하느님 나라를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누구의 증언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영광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죠. 예수님께서는 누누이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하느님 나라는 와있고, 구원은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 한번도 현실과 동떨어진 복음을 말씀한 적이 없었습니다. 철저히 현실 위에서 듣는 사람들의 맥락에서 구원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열광했던 이유는, 농부에게는 농부가 이해할 수 있는 씨뿌리는 비유로, 어부들에게는 고기잡는 비유로, 아픈 이에게는 치유로서 다가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근본적으로는 그리스도께서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그 시대의 맥락 안에서, 그 시대를 초월한 기쁨을 선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이런 관점에서 교회가 예수님처럼 복음을 선포하고 있는지 성찰해 본다면, 부끄럽습니다. 저 역시 현실과 동떨어진 복음을 여러분들과 나누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됩니다. 만약 그렇게 느끼신다면, 우리 모두 현실을 직면하며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삶을 포장할 필요도 없고 더 슬프게 바라볼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 감싸 안으며, 성령께 기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만이 아니라 삶으로, 무엇보다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며 담대하게 우리 삶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기도하며 담대하게 우리의 현실을 직면하며 복음을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현존을 통해 어두운 현실 안에서 거룩하게 기쁜 소식을 살아낼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복음환호송으로 강론 마치겠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주리라.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