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마재는 정약현,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4형제의 고향으로 한국 천주교회 요람지의 하나다.
마재가 한국 천주교회사와 관련되기 시작한 시지는 1784년 한국 천주교회 공동체 성립 이전부터이다

2006년 의정부교구 이한택 주교의 축성으로 남궁경신부가 생다터 약 500m에 마재성지를 새로 조성하였다.
이곳에 있던 나주 정씨 집안의 후손들은 18세기 후반부터 집아에 보관되어 있던 한역서학서를 읽고 있었는데 그중에세 정약전은 1779년에 권철신(암브로시오)의
주도로 열린 천진암 주어사 강학회에 참석하여 이벽(세레자 요한)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듣고 천주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세례는 받지 않고 미루다가 끝내 세례를 받지 못했다.
정씨 형제 중 특히 초기 교회와 관련햇 주목되는 이는 정약종일가이다. 정약종은 교리 지식에 해박하였으며 주문모신부에 의해 명도회 회장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정약종은 그의 형 정약전이나 동생 정약용보다 늦게 천주교를 수용하여 1786년 세례를 받았으나 그이 형제들과는 달리 끝내 배교하지 않고 한결같은 믿음으로
교회 활동에 헌신하다가 1801년 신규박해때 참수령으로 순교하신 분이다.
1785년 봄에 명례방 집회가 형조에 발각되어 유림에 척사통문(천주교를 배척하는 회람 형식의 글)이 돌자 사대부가의 천주교 배척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정씨 가문에서도 명례방 집회를 참석했던 정약전과 정약용 등이 부친으로부터 엄한 추궁를 받았다. 그러다가 1791년 신해박해를 계기로 조정에서 정식으로
천주교 금지령이 내려지자 정씨 집안의 신자들은 문중으로부터 이전보더 더욱 심한 박해를 받게 되었다.
1786년 세례 입교한 정약종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그의 식솔을 이끌고 현재의 한강 팔당댐을 건너 광주 분원으로 이주하였다. 정약종의 가정은 1800년
양근 지방의 박해를 분원에서 서울로 피나하였으며 이때 정약종의 처인 유 체칠리아와 자녀인 정하상, 정정혜가 주문보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1801년 신유박해로 정약종과 그의 전처 아들인 정철상이 순교하였으며 1814년에 상경한 정하상은 1816년부터 조선교회의 재건과 성직자 영입을 위해
노력하였다. 마재에 있던 그의 어머니 유 체칠리아와 여동생 정정혜는 정하상이 서울로 간 후 충청도에서 6~7년간 거주하다가 박해를 피해 서울로 와서
치명할때까지 10여년간 살았다고 한다.

마재는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증거자를 비롯한 다산 정약용 등 4형제의 생가터입니다. 마재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크게 만나는 한강변에 안겨있는
마을로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증거자가 태어나고 묻히신 곳입니다.
마재는 이벽, 이승훈, 황사영 등 신앙의 선도들의 발길이 잦았던 곳으로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위치합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이면서
한국 최초의 신학자인 정약종 순교자는 다산 정약용, 정약전과 한 형제이면서 끝까지 신앙을 지켜 순교한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기둥이었습니다.
순교자께서는 형제들 중에서 가장 늦게 신앙을 받아 들였지만 불타는 열성으로 끝까지 신앙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최초의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의
초대회장으로 전교에 힘썼으며 특히 한문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 최초의 순수 한글 교리서인 <주교요지>를 편찬하였습니다.
그 뒤 교리서를 종합 정리하여 <성교전서>라는 책을 쓰던 중 신유박해가 일어나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셨습니다. 가족들도 기해박해때 모두 순교하여
모든 것을 하느님께 봉헌한 참 신앙인의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정약종 가계도를 보면 정약현과 그이 딸 정난주(마리아), 정약용(세례자요한)은 유배를 떠나고 큰 형 사위인 황사영(알렉시아)와 정약종(아우구스티노)
그의 부인 성녀 유조이(체칠리아), 큰 아들 정철상(가를로), 둘째 성 정하상(바오로), 딸 성녀 정정혜(엘리사벳)은 순교하므로 믿음에 사표가 되었고
특히 정약종 가족은 부인, 아들, 딸 모두 마재의 성가정을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