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나무그늘 3월호 주교님 말씀] 슈퍼마켓 신앙
- 등록일
- 2025-03-22
- 조회
- 15
- 파일
현대인들은 슈퍼마켓에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골라 사들이는 데에 아주 익숙합니다. 그런데 그 ‘슈퍼마켓 사고방식’이 신앙영역에 스며든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교회의 가르침에서도 마음에 드는 것만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외면하는 이들이 늘어나는 것은 아닐까요? ‘세상이 변했는데, 이젠 교회도 바뀌어야 하지 않아?’라고 불평하면서 교회 가르침 자체를 바꾸려는 이들도 있습니다. 교회의 생각보다 내 생각이 더 옳을까요? 성령의 인도로 이천 년 동안 온갖 풍상을 겪으면서 유지되고 쇄신되어 온 가톨릭교회보다 세상이 더 지혜로울까요?
요즘에는 예수님의 말씀마저도 자기 마음에 드는 것만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무시하는 일도 적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하신 첫 번째 말씀을 예로 들어봅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것이 복음, 기쁜 소식이라고 하시면서, 그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회개하고 믿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회개는 하느님께로 돌아서서 죄로 얼룩진 옛 삶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비유로 얘기하면 어두운 동굴에서 벗어나 빛을 따라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교회는 기쁜 소식인 하느님의 자비를 선포하면서도 동시에 회개할 것을, 새로운 삶을 살아갈 것을 변함없이 요청하였습니다. 회개는 구약의 예언자들은 물론 예수님도 줄기차게 요구하시던 바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은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을 돌에 맞아 죽을 위험에서 극적으로 구해주십니다. 율법대로 하면 그 여인은 마땅히 처벌받아야 했지만, 예수님은 ‘너를 단죄하지 않겠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당부하십니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는 다시는 죄짓지 마라.” 예수님은 죄인에게 너그럽게 용서를 베푸시지만, 죄인이 그 용서를 받고서 새롭게 살기를, 곧 회개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인은 하느님의 자비에는 반색하면서도, 회개는 꺼리는 경향이 매우 짙습니다. 심지어 하느님의 자비를, 칼국수용 밀가루 반죽을 밀대로 최대한 늘리듯이, 최대한 자기 쪽으로 잡아당겨서 편한 대로 해석합니다. ‘하느님은 자비로우시니까 다 받아 주실거야. 이 정도는 너그럽게 용서해 주실거야!’라고 생각하면서 옛 생활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려고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회개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부담스러워하고 불편하게 여깁니다. 교회는, 어쩌면 과거보다 더 분명하게 회개를 요구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 자체로는 좋고 의미 있는, 인간의 자유, 자율성, 자기 결정권을 방패 삼아서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회개를 소홀히 하는 흐름이 점점 더 강해지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한탄이 떠오릅니다. “모두 자기의 것만 추구할 뿐 예수 그리스도의 것은 추구하지 않습니다.”(필리 2,21) 올해 사순절에는 자기 것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을 추구하는 훈련을 좀 더 부지런히 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