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주교님 말씀] 성유축성미사_20250417

등록일
2025-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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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님은 2025년 정기 희년의 주제를 ‘희망의 순례자’로 정하셨습니다. 하느님 백성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안고 순례하는 사람들이란 뜻에서 그런 주제를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로마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죽은 이들을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하느님”을 믿기 때문에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4,17-18)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제들도 희망의 순례자인 하느님의 백성 일원입니다. 동시에 그 백성을 이끄는 목자이기도 합니다. 사제가 지닌 목자의 직무는 –곧 있을 ‘사제들의 서약 갱신 기도문’에 나오는 대로- “대사제이신 그리스도의 충실한 일꾼으로서” 사람들을 “구원의 원천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시면서 그들에게 해방과 치유와 자유를 주시는 분입니다(루카 4,10-19 참조).
저는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사제의 역할을 성지순례단의 가이드에 비교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성지 순례 가보신 분들을 경험하셨겠지만, 좋은 가이드를 만나면 성지 순례의 결실이 훨씬 더 풍요로워집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사제들이 희망의 순례자인 하느님 백성에게 좋은 가이드가 될 수 있을까요?

 

1. 좋은 가이드가 되려면 자신이 안내하는 성지에 대해 풍부하고 정확한 지식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지식을 바탕으로 성지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잘 설명해 주고, 그래서 순례자들의 신앙이 한층 더 깊어지도록 인도한다면 좋은 가이드입니다.
마찬가지로 사제도 우리 신앙의 대상인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합니다. 또한 신앙으로 이끌고 도움을 주는 교회, 성사, 성모 마리아, 성인들에 대해서 정확하고 풍부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신자들이 예수님이 원하신 대로, 하느님을 굳건히 믿으면서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지니고 기꺼이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풍부하고 정확한 신앙 지식을 갖추기 위해서는 늘 공부해야 하겠지요. 신학교 때에 배운 것은 기본일 뿐입니다. 꾸준한 공부를 통해서 학창 시절에 배운 것에 새로운 것을 더 보태고, 더 정리하고, 더 다듬어야 합니다. 현대는 평생 교육의 시대라고 합니다. 사제도 여기서 예외가 아닙니다. 바쁜 와중에서도 시간을 내서 부지런히 공부하는 사제를 보면서 신자들은 자신들도 공부하는 신앙인이 되고자 할 것입니다.

 

2. 성지 순례 중에는 식사가 매우 중요한 몫을 차지합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있지요. 아무리 유명한 성지라도 우선 잘 먹고 배가 불러야 좋은 것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해외에 나가면 음식이 맞지 않아서 고생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유능한 가이드는 이런 사정을 고려해서 식사에 많은 신경을 씁니다. 현지 음식이라고 해도 가능한 우리 입맛에 맞게 요리하도록 부탁합니다. 현지 음식에 물릴만하면 한국 음식점을 찾아가고, 한국 음식점이 없으면 중국집이라도 가서 음식이 맞지 않아서 배곯는 사람이 없도록 신경을 씁니다.
사제 역시 신자들이 영적 양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한국인에게는 밥이 주식이듯이,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하느님 말씀과 성체가 주식입니다. 성경 말씀을 듣고 마음에 새기고,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를 영함으로써 우리의 신앙이 자라나고 튼튼해집니다.
같은 식재료라도 요리하는 사람의 능력과 정성에 따라 맛이 달라집니다. 좋은 요리사는 손님들에게 가장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내려고 노심초사합니다. 영적 양식의 요리사인 사제도 그래야 할 것입니다. 어느 본당에 강론을 잘하는 신부님이 계셨는데, 그 본당 신자 한 사람이 신부님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신부님, 어떻게 그렇게 강론을 신자들 입맛에 착착 맞게 하십니까?” 그러자 신부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신자들이 저를 초대하면 가장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려고 애를 쓰잖아요. 저도 신자들에게 어떻게 하면 가장 맛있는 영적 음식을 대접할까, 고민하고는 합니다.”
사랑 많은 어머니가 가족에게 가장 맛있는 음식을 해 먹이려고 애쓰듯이 우리 사제들이 신자들을 위해 가장 맛있는 영적 음식을 마련하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그 음식에서 힘을 얻은 신자들은 어둠에서 빛을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또한 더 좋은 세상, 정의와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을 만드는 데에 이바지하고 헌신할 것입니다.

 

3. 해외 성지 순례는 보통 20-30명의 사람이 함께합니다. 순례자들은 성지 순례를 통해서 신앙을 새롭게 해보겠다는 선한 지향을 갖고 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각자의 성격과 개성이 드러납니다. 대부분 가이드의 설명을 귀 기울여 듣고 자발적으로 기도하면서 제대로 성지 순례를 잘하지만, 반면에 불만이 많거나 모난 성격으로 인해서 분위기를 흐리게 하는 사람도 가끔 있습니다. 유능한 가이드라면 이런 사람을 인내와 지혜로 설득해서 성지 순례를 무사히 마치도록 이끌어줍니다.
사제 역시 하느님 나라를 향해 순례하는 다양한 신자들을 인내와 지혜로 인도하는 가이드가 되어야 합니다. 신자답게 성실하게 사는 이들은 계속 그렇게 하도록 격려하고 지지해 주어야겠지요. 가난이나 병고와 노쇠 등의 이유로 지치고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다시 일어서서 인생 여정을 걷도록 위로와 용기를 주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신앙에 의심을 품거나 교회에 대해 불평불만이 많은 이들도 있습니다. 이런 이들을 상대하기란 녹록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사제는 길 잃은 한 마리 양도 찾아 나서신 예수님께 의탁하여 이런 이들을 설득하고 품어 안도록 애써야 하겠지요. 오늘 제1독서의 표현을 빌린다면, 사제들은 그리스도가 그러셨던 것처럼 “슬퍼하는 이들에게 재 대신 화관을, 슬픔 대신 기쁨의 기름을, 맥 풀린 넋 대신 축제의 옷을” 입혀주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4. 순례 가이드는 순례자들이 순례를 마치고 만족한 표정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보람과 기쁨을 누립니다. 어떤 이들은 돌아가면서 가이드에게 진심으로 ‘수고했다.’, ‘고맙다.’라는 말을 남긴다. 가이드는 자신이 안내했던 이들의 밝은 모습, 고맙다는 말 한마디에 그동안의 피곤함을 잊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제도 자신이 행한 말씀 선포와 성사 거행을 통해서 신자들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기쁨과 보람을 누리게 됩니다. 또한 인생 여정을 다 마치고 신앙 안에서 편안하게 하느님의 품에 안기는 신자들을 보면서 가슴 뿌듯함을 느낄 것입니다. 사제가 좋은 가이드처럼 신자들에게 진정으로 봉사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할 때, 신자들은 사제의 그런 노력을 잘 알아보고 기도로써, 격려와 응원으로써 응답합니다. 그런 응답이 많을수록 보람과 기쁨을 가득 누리는 행복한 사제가 될 것입니다.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는 “웃음은 인간의 얼굴에서 겨울을 몰아내는 태양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저는 이 말을 조금 바꾸어서, ‘기쁨과 행복이 충만한 사제는 교회 공동체에서 겨울을 몰아내는 태양이다.’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모든 사제가 좋은 영적 가이드가 되어서 신자들을 구원의 원천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소명을 기쁘고 행복하게 수행하도록 꾸준히 기도하기로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