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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님 말씀] 주님 수난 예식_20250418

등록일
2025-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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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방금 우리는 주님의 수난기를 들었습니다. 매해 왜 이렇게 긴 수난기를 들어야 할까요? 오늘 제1 독서에서 그 대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이사 52,4-5)


‘그의 상처로 우리가 나았다.’ 바꿔 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덕분에 우리가 살게 된 것입니다. 죄로 인해 멸망의 운명에 처한 우리가 생명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이 생명의 길 종착지는 하늘나라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 그분과 하나가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제2 독서 히브리서에서 말하듯이 예수님을 따르려는 노력을 꾸준히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5,9)


하늘나라에 이르러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려면 이 세상에서 부지런히 예수님을 따르고 그분께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그분께 순종하려면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해 예수님의 수난기를 반복해서 듣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수난기는 과거 한때의 이야기로 그치지 않습니다. 주님의 수난기는 지금 우리가 몸담고 사는 세상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수난기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은 바로 우리 주위에서 흔히 만나는 사람들이고, 바로 우리 자신이기도 합니다.

먼저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의 모습을 보기로 합니다. 최후 만찬 석상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모두 나를 버리고 떨어져 나갈 것이라는 예고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하지만 막상 위기의 순간이 닥치니까 스승을 홀로 버려두고 도망쳐 버립니다. 제자 중의 으뜸인 베드로는 스승의 안위를 걱정하여 그분의 뒤를 따라갔지만, 궁지에 몰리게 되자 스승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잡아뗍니다. 이런 약한 모습의 제자들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세례 때에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살겠다고 다짐하지만, 작은 시련에도 쉽게 흔들리고 방황하고 무너지는 우리들입니다.

대사제와 수석 사제들. 그들은 메시아가 오셨지만 알아보지 못합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기존의 종교적 전통과 질서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인물이라고 단정하고 죽이려고 합니다. 마음이 닫히고 굳어버려서 하느님의 손길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 완고한 마음의 사람은 오늘날에도 적지 않습니다. 고정관념과 편견 속에서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잃어버린 채 미움과 증오를 키우고 심지어 폭력도 불사하는 종교인들, 신앙인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 그는 예수님이 무고하게 고발당하였다는 것을 알아챕니다. 그래서 처벌하기를 주저합니다. 하지만 귀를 막고 소리를 지르면서 대드는 군중의 요구에 굴복하여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내어줍니다. 진리를 외면한 빌라도의 모습은 오늘날에도 반복됩니다. ‘떼쓰기 민원’에 밀려서 해야 할 일을 못 하는 공직자들, 그리고 표를 얻기 위해 아닌 줄 알면서도 강성 지지층을 따라가는 정치인들에게서 빌라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군중은 수석 사제들의 부추김을 받아 예수님을 죽이라고 아우성칩니다. 오늘날에도 대중은 자신의 이익과 편리 때문에 또는 여론 조작으로 이성을 잃어버린 집단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은 순하지만, 군중심리에 휩쓸리면 악마의 모습으로 변하기 쉽습니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와 같은 SNS에서 익명의 군중이 한 사람을 표적으로 삼아 악성 댓글을 집요하게 달거나 신상 털기를 하여 끈질기게 괴롭히는 현상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로마 병정들은 빌라도가 명령한 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 밑에서 제비를 뽑아 예수님의 속옷을 나누어 갖습니다. 한 사람은 형언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죽어 가는데 그런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작은 이익을 챙기는 데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남이야 죽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자기의 이익만을 챙기는 이런 몰인정한 모습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자주 반복됩니다.

수난기에는 이런 어두운 군상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 등과 같은 여인들과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제자가 서 있었습니다. 당시에 여성들은 여자라는 이유에서 제대로 인간 대접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이들이 예수님을 끝까지 따랐습니다. 또한, 명망 있는 의회 의원 아리마테아 출신 요셉은 빌라도에게 청하여 예수님의 시신을 넘겨받아 장사를 지냅니다. 유다인들의 최고 의회 의원인 니코데모도 장례에 쓰일 향유를 가져옵니다. 요셉이나 니코데모는 사회적 지위로 보았을 때 이렇게 행동하기가 분명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체면의 손상이나 비난을 감수하고 예수님께 마지막 예를 드린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 십자가 주위에 있었던 여인들처럼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도 주님께 대한 신앙심만은 돈독한 이들이 있습니다. 요셉이나 니코데모처럼 사회적 제약을 넘어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주님을 충실히 증거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어둠 속에 빛나는 작은 별과 같습니다.

 

 

3. 이제 수난기의 주인공인 예수님께로 눈을 돌려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체포하러 온 사람들에게 “너희가 나를 찾는다면 이 사람들은 가게 내버려두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의 나약함과 배신을 잘 아시면서도 그들에 대한 염려를 멈추지 않으신 것입니다. 작은 섭섭함도 견디지 못하고 앙갚음할 기회를 노리는 옹졸한 우리와는 아주 다른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증오하면서 고발할 구실을 찾는 유다의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당당하게 밝히십니다. 궁지에 몰려 스승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와는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생사여탈 권을 쥐고 있는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서 한마디의 변명도 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께 굳건히 의지하시면서 갖은 모욕과 수모를 묵묵히 견뎌내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큰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어머니를 염려하여 사랑하는 제자에게 어머니를 맡기십니다. 고통 중에서도 인간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시지 않는 모습입니다. 조금만 몸이 아파도 짜증을 내면서 가족을 힘들게 하고, 일이 잘 안 풀리면 어둡고 우울한 표정으로 주위 사람에게 무거운 분위기를 전해주는 우리와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마치 하느님께 버려진 듯한 느낌이 들 정도의 큰 절망감을 겪으셨지만, 하느님 아버지께 끝까지 충실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라는 말씀을 끝으로 숨을 거두십니다. 하늘 아버지께 순종하여 인간 구원의 사명을 완수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성부께 순종하심으로써 우리의 불순종을 기워 갚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둠 속을 비추는 참빛이십니다. 우리 모두 그 빛에 의탁합니다. 그래서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속을 온갖 어둠을 몰아내어 주시기를 청합시다. 또한, 그분 빛의 힘으로 우리 자신도 세상의 빛이 되기를, 작은 빛이라도 되기를 청합니다.
우리가 몸담고 사는 세상에는 다양한 어둠이 있습니다. 우리 주변이 어두워지면 질수록 우리는 위로부터의 빛에 우리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참된 빛을 향해 돌아서서 그 빛을 받으면서, 또한 그 빛을 전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은총을 청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