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전례/기도

4월 2일 강론

등록일
2020-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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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2 강론.hwp

어제 sns에서 2지구 사제들이 잠깐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거기서 본당 주임신부님이신 이정윤 신부님이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무엇 때문에 우리가 신앙을 살아가고 있는지 성찰하면 좋겠습니다. 이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으로 가야하지 않을까요?” 이 말이 제게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종교라는 말은 영어로 religion입니다. 이는 ‘다시 잡아매다’라는 뜻의 라틴어 ‘religare’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네요. 종교를 통해서, 그러니까 신앙생활을 통해서 우리들이 무언가를 다시 잡아야함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특히 ‘다시’라는 말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종교는 하루하루 흘러가는 시간들 안에서 ‘스스로를 다시 잡아야’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힘들게 살아가는 이웃들을 잊고 살았다면 ‘다시 기억해야’ 한다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적으로 보자면 시작이요 끝인, 알파요 오메가인 ‘하느님을 우리 삶으로 다시 붙들어 매야’한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사순시기인 지금은 ‘다시 하느님께 방향을 틀어야 한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겠지요.

오늘 복음도 이러한 관점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과 논쟁을 벌입니다. 유다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었습니다. 1독서를 보면 아브라함이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잘 보여주죠.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 가나안 땅 전체를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 소유로 주고, 그들에게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 너는 내 계약을 지켜야 한다.”
유다인들은 아브라함과 하느님이 맺은 이 계약대로 율법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율법에 집착을 한 나머지,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라는 하느님의 말은 잊은 것처럼 보입니다. 유다인들은 자신들이 선택받았다는 선민사상에게 집착한 나머지 의롭게는 살 수 있게 되었지만, 하느님을 삶으로 녹여내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예수님과 논쟁을 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오히려 아브라함을 통해, 하느님께 다시 돌아올 것을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으로 계시된 구세사의 시작부터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역사는 하느님 중심으로 흘러가는 것이며, 하느님의 영광으로부터 모든 거룩함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법만으로는 인간은 거룩해질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유다인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너희가 지키는 율법은 의미없는 것이다”는 아니었을 겁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한 획도 고치지 않으십니다.(참조: 루카16,17) 단지 율법을 지키기 이전에 그들의 삶이 하느님을 향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아니 하느님을 향하고 있지 않다면,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올 것’을 공생활 전부를 통해 말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2000년이 지난 오늘도 그리스도는 같은 말을 하고 계십니다. “종교인인 네가 잊고 있었던 것은 무엇인가? 종교인인 너희들이 잊고 있었던 것은 무엇인가?”
오늘 복음의 끝은 더 의미심장합니다. 신앙인들은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하고 예수님은 몸을 숨겨 성전 밖으로 나가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돌을 던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오히려 예수님을 우리 삶에서 쫓아내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신앙인인 우리들은 다시 잡아야 합니다. 하느님께 다시 방향을 돌려야 합니다. 하느님을 삶에서 인식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나 자신을 직면하며, 세상에서 힘들어하는 이웃들을 직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신앙을 살아가고 있나요?” 오늘 하루 함께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