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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제2주일 하느님 자비의 주일

등록일
2024-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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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하늘 따뜻한 햇볕이 비추는 아침이었습니다. 오늘 미사 때에는 '성품성사'를 교리강론으로 했습니다. 5월에는 새 교구장님 착좌식도 있어 적절한 시기에 교리가 이루어진 듯 합니다.

주교회의의 영상교리를 시작으로 성사에 대한 일반적인 내용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미사 후에는 사목회의가 있었습니다. 쉼터에 대한 부분과 5월 성모의 밤에 대한 논의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작년 5월에는 하지 못했던 매일 묵주기도를 5월 1일부터 하기로 결정하였고. '성모의 밤' 기도도 저녁에 하다보니 어르신들이 참석하지 못하는 것을 고려하여 주일미사와 함께 하는 방법을 생각해보기로 했습니다.

회의를 마치고 부대찌개로 식사를 하고 오랜만에 '아름다운 비행' 카페에 가서 차를 한 잔 나누었습니다. 음료값은 가시미로 형제님이 한턱 쏘셨습니다. 일명 '아비'의 공터는 아름다운 정원으로 변해있었습니다. '아름다운 비행'에 좋은 일도 더 많이 생길 것 같습니다.

 

오늘은 부활제2주일 나해강론을 올립니다.

부활제2주일나해   요한20,19-31>

얼마 전에 본 영화 ‘부활’의 내용이다.

<로마의 호민관, 클라비우스는 빌라도 총독에게 무덤에서 사라진 나자렛 예수를 찾아내서 다리를 부러뜨려 확실하게 죽이라는 명령을 받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호민관 클라비우스는 예수님이 골고타에서 돌아가시는 현장의 책임자이기도 했으며, 전쟁에 신물이 나서 ‘죽음이 없는 일상’을 희망하며 사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가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러 갈릴래아로 가는 여정에 함께 하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치유하는 장면을 목격하였다. 그는 많은 정신적 혼란을 겪으면서도, 그는 바위 위에서 기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옆에 앉았다.

“나는 당신께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마음 가는 대로 말해 보아라.”,

“이 모든 게 제가 알아 온 세계와 일치되지 않습니다.”

“눈으로 보고도 아직 의심하느냐? 그러니 보지 못한 자들은 어떻겠느냐?” 라고 반문하셨다. “무엇이 두려우냐?”

“이게 정말 진실인지 제 모든 걸 걸어도 되는지 알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그분을 알기 위해 힘써라.”

“당신이 죽던 날 나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알고 있다.”하며 예수님은 그를 쳐다보며 “무엇을 찾느냐? 확신, 평화” 그리고 “죽음이 없는 일상” 예수님은 미소를 지었다.

 

영화에서 클라비우스는 예수님께 대답하지 못했다. 이미 예수님이 자신의 모든 것을 꿰뚫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다. 허기를 채운 클라우비는 호민관의 지위를 표시하는 자신의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식사비로 빼서 주었다.

그러자 식당 주인은 “그 일을 정말 믿으세요?”라고 묻는다.

“이건 확실하지. 내가 예전과 같을 수는 없다는 것… .” 그리고 광야로 길을 나선다.

예수님의 상처를 직접 만져보겠다는 토마스의 말은 예수님을 지식이나 의지로 믿는 것만이 아니라, 참으로 느끼고 만지며 온전히 체험하고 싶은 갈망을 지닌 우리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다.

하지만 누가 어떻게 그 갈망을 채워줄 수 있을까? 그 갈망마저 예수님께서 채워주신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나타나셔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그러자 토마스는 그리스도인이 예수님께 고백할 수 있는 가장 명확하고 진실한 사랑의 신앙고백을 한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추상적인 신앙이 아니라 부활하신 분을 참으로 체험하여 주님과의 인격적 관계가 생긴 살아있는 고백이다.

하늘을 바라보며 상상을 해 본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주님과 많은 추억이 담겨있는 갈릴래아 호수를 바라보는 토마스 사도.

생전에 그를 벗이라 불러주신 예수님을 보고 싶은 그리움은 이런 노래 가사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어둠 속에서 혼자 울고 있을 때 / 나의 손을 꼭 잡아준 사람

비바람이 불어도 늘 곁에 있어 준 사람 / 그건 바로 당신이었소

내 삶이 때로는 노래가 돼요 / 때로는 서글픈 사랑이 돼요

황금빛 노래 붉은 파도 위를 달리는 / 바람이 되고 싶소

내 친구여 내 사랑아 나 죽어도 / 그대 잊지 않으리

평생을 사랑해도 아직도 그리운 사람 / 그대는 내 친구여”(가수 패티 김의 ‘그대 내 친구여’)

 

목숨을 바치는 사랑, 죽음을 이기는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한 제자에게 세상의 주인들이 그의 주님, 하느님일 수 없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다른 것은 몰라도 예전 나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것이 믿음의 증거이며 주님을 만남에 대한 응답이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그 고백에 눈이 열려 주님이시고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알아보고, 예수님처럼 부활하여 새 생명을 살아갈 기운, 성령이 함께 하신다.

주님을 만나고 그 상처를 만져보는 사건은 토마스에게만 일어나지 않고 우리에게도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사제가 성찬례에서 우리 손 위에 놓는 그리스도의 몸은 옆구리와 손발의 상처를 지니신 예수님의 현존이다.

우리는 그분의 몸을 손 위에 맞아들임으로써 우리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우리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게 된다. 예수님의 그 상처로 우리의 상처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의 길에 들어선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만나는 다른 길도 우리에게 일러주신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이르신다. 그리고 요한은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전한다.

성체께 대한 믿음과 말씀에 대한 믿음이 우리를 주님과의 만남으로 이끌어 간다.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로 구성된 미사의 깊은 신비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께서 당신을 우리에게 내어주고 보여주시고 말씀을 건네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