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보성인

두려움 없이 새로운 길 개척한성 바오로6세 교황

축일 : 5월 29일
활동연도 : 1987-1978년

1897년 9월 26일 이탈리아 롬바르디아(Lombardia) 지방 콘체시오(Concesio)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Giovanni Battista Montini)는 어려서부터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다. 변호사였던 그의 아버지 조르지오 몬티니(Giorgio Montini)는 일간지 ‘브레시아 시민’(Il Cittadino di Brescia)의 편집자로서 반교회적 사상과 투쟁하였고, 어머니 주디타(Giuditta Alghisi)는 교회 여성운동의 지도자였다. 허약한 체질에 수줍음을 잘 타는 성격이었으나 총명하고 신심이 깊었던 그는 1903년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체사레 아리치 학교(Cesare Arici Institute)에 들어가 1914년까지 공부한 후 아르날도 다 브레시아(Arnaldo da Brescia) 고등학교를 거쳐, 1917년 브레시아 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집에서 통학하였다.

1920년 5월 29일 사제품을 받고 그는 같은 해 11월 로마의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철학과 교회법을, 로마 대학에서 문학을 배웠으며, 1922년부터는 교황청 외교관 학교(Academia dei Nobili Ecclesiastisi)에서 공부하였다. 1923년 3월 폴란드 바르샤바(Warszawa) 주재 교황대사 보좌관으로 파견되었으나 그곳 기후에 적응하지 못해 11월 로마로 돌아와 1년 동안 교회법과 외교학을 연구한 후 1924년 10월부터는 교황청 국무원에서 근무하였다. 1925년에는 이탈리아 가톨릭 학생연맹(FUCI)의 지도신부로 임명되어 파시즘 학생연맹과 대립하여 싸우기도 했다. 1931년 다시 국무원에 근무하면서 교황청 외교관 학교에서 교황청 외교사를 강의하였다.

그는 1937년 12월 13일 완벽주의자로 유명한 교황청 국무원장 에우제니오 파첼리(Eugenio Pacelli) 추기경의 비서로 발탁되어 몬시뇰로 임명되었다. 1939년 파첼리 추기경이 교황 비오 12세(Pius XII)로 선출된 후에는 새 국무원장 루이지 막리오네(Luigi Maglione) 추기경을 보좌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포로 문제, 유대인 문제 등에 관심을 갖고 활동했으며, 전쟁으로 집을 잃은 무주택자들을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또한 미국가톨릭복지협회(NCWC)와 교황청 간의 연락 업무를 담당하는 한편, 국제 카리타스(Caritas Internationalis)와 국제 가톨릭 이주자위원회(International Catholic Migration Commission)의 설립에도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954년 11월 1일 밀라노(Milano) 대교구장으로 임명된 그는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며 왕성한 사목활동을 펼쳤다. 많은 성당을 신축 · 보수하고 사목방문에 힘쓰며, 교회를 떠난 노동자들에게 많은 관심을 갖고 여러 작업장을 찾아다니며 복음의 사회교리를 설교하여 그들이 교회로 되돌아올 수 있도록 힘썼다. 그는 평신도 사도직과 문화 활동을 장려하고 가톨릭 대학교와 신학교에서 사회과학을 가르치도록 권했으며, 그리스도교 노조 활동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청소년 문제에도 큰 관심을 두고 적극 참여하도록 유도하였다. 1958년 12월 15일 교황 성 요한 23세(Joannes XXIII, 10월 11일)에 의해 추기경에 임명된 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준비위원회와 실무조정위원회의 임원직을 맡아 공의회 제1회기(1962년)에 참석하였다.

1963년 6월 3일 교황 성 요한 23세가 선종한 후, 6월 21일 새 교황으로 선출된 그는 이방인의 사도인 ‘바오로’를 교황명으로 택하고, 6월 30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바오로 6세 교황으로 착좌하였다. 그는 곧 공의회의 속개를 발표했고, 제4회기까지 열린 공의회는 1965년 12월 8일 폐막되었다. 제4회기(1965년) 때 지역 주교들에게 교황에 대한 자문 권한을 부여하는 영속적 기구로서 주교대의원회의 설립이 착수되었다. 그리고 공의회의 후속 조치로 전례 개혁, 미사 중 모국어 사용,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한 대화, 이웃 종교인 및 무신론자들과의 대화 등 가톨릭교회의 현대화가 이루어졌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비행기와 헬리콥터를 타고 외국을 방문한 최초의 교황이다. 1964년 1월에는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고, 12월에는 세계 성체대회 참가를 위해 인도 뭄바이(Mumbai)를 방문하였다. 1965년에는 미국 뉴욕의 국제연합(UN) 본부를 방문해 평화를 호소하는 연설을 했고, 1967년에는 터키 이스탄불(Istanbul)을 방문했다. 1968년에는 라틴아메리카 대륙에 속한 콜롬비아를 찾아 보고타(Bogota) 세계 성체대회와 메데인(Medellin)의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연합회 총회에 참석했으며, 1969년에는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세계교회협의회(WCC) 교회일치사무국과 중앙아프리카를 방문하였다. 1970년에는 아시아를 방문하던 중 필리핀 마닐라에서 암살 위기를 겪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