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보성인

 

성녀 우술임 수산나

 

  경기도 양주에 살던 어느 양반집의 딸로 태어난 성녀는 
열다섯 살 때에 인천에 살던 어느 신자에게 시집을 가서
남편의 권고로 입교하여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녀는 1828년에 한 번 잡혀 사형선고를 받을 뻔했으나,
마침 해산이 임박하였으므로 몇 주일 동안 갇힌 생활 끝에
풀려 나왔는데 이때 받은 형벌로 인한 상처 때문에 일평생을
고생하며 지냈다고 한다. 그 후 남편을 여의고 서울로 올라온
수산나는 여러 교우 집으로 다니며 하인노릇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였으나 덕행이 뛰어나 사람들의 눈을 끌게 되었다.

  그녀는 기도에 전념하였으며, 천주를 사랑하는 뜻으로 천한 
일들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녀는 늘 "내 마음에 걸리는 것은
다만 순교할 기회를 놓친 것뿐이다." 라고 하였는데, 하느님
섭리로 그 기회를 다시 얻게 되도록 기도하였다고 한다. 
  1846년 병오박해 때에 수산나는 여교우들과 함께 석정동의 김대건
신부 댁에서 생활하고 있다가 김신부가 체포된 후 이 아가타(Agatha)의
집에 있다가 그녀와 함께 잡혔다. 포청에서 수산나는 치도곤, 태형,
주리 등의 혹형을 당하였지만 배교한다는 소리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매질하라는 명령에 따라 수 없는 매를 맞고 결국
44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는데, 이때가 1846년 9월 20일이었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