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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신부와 함께 하는 대중 음악 이야기 5 - 길(폴킴)

등록일
2020-03-17
조회
657

앙 신부와 함께하는 대중 음악 이야기 5

 

저는 시대를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시대나 그 시대적 문화와 사회적 배경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모두 그 시대의 문화에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기에,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세대 간 소통과 화합을 위해 중요합니다.

 

요즘 시대에는 꼰대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지요. 꼰대라는 말이 어감상 참 안 좋습니다. 저도 이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요. 신앙적인 메시지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순간에는, 신자분들의 삶에 돌이 되는 메시지더라도 첨벙 던져야 하는, 신부로서의 숙명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꼰대라는 말이 참 다양하게 정의되고 있는데, 유일하게 제 마음에 든 정의가 있기에 소개합니다. 그 정의에 따르면 꼰대는, ‘자신이 살아왔던 문화와 관습을, 다른 시대와 다른 문화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50~60년대를 자신의 문화로 가지고 있으신 분들은 전후에 어려운 상황을 지내셨고, 70~80년대는 군부통치와 경제 개발의 시대를 지내셨으며, 90년대는 경제의 부흥기인 듯하였으나 IMF 라는 어려움을 겪었고, 2000년대는 밀레니엄 세대와 월드컵 그리고 인터넷과 휴대폰의 등장으로 생활 패턴이 급속도로 변화함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더 이상 부모보다 더 잘 살수 없다라는 경제적 무기력감과, 급속히 개인화되어 정이 없는 사회, 그리고 개인의 인권이 중요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것의 문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시대적으로 발생하는 공통의 화두로 인해 거대 담론이 가능했던 공동체적 시대를 살아왔던 어른들이 그 시대의 문화만 고집한다면, 지금 청년들의 개인주의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경제 개발의 시대를 살아왔던 분들이 그 시대의 문화만 고집한다면, 지금 청년들의 경제적 박탈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인터넷과 휴대폰으로 대변되는 문명의 이기들이 익숙하지 않았던 아날로그 세대의 어른들이 그 시대의 문화만 고집한다면, 지금 청년들의 네트워크 문화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반대로, 지금의 청년들이 지금의 문화만 앞세워 어른들 시대의 문화를 밀쳐낸다면, 그 마저도 어린 꼰대가 됩니다.

 

지금의 어린아이들이 청년이 되었을 때의 시대적 문화와 상황은 사실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급속도로 바뀌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고 같이 살아내려면, 서로가 속해 있는 상황과 문화를 관심 있게 지켜보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또한 이렇게도 생각해볼까요? 지금 순간에는 어린이도 있고 청년도 있고 어른도 있지만, 시간을 길게 늘어뜨려 생각해 보면, 그 누구나가 어린이였고 청년이며 어른이 될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 자리가, 우리가 세대를 아울러 꼰대가 아니라, 따스함으로 소통할 수 있는 교두보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오늘 제가 소개할 노래는 폴킴의 이라는 노래입니다. 폴킴은 지극히 제 주관적 소견으로는 성시경 이후 우리나라 남성 발라더 계보를 이을 만한 가수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폴킴이라는 가수에 대해서는 비하인드를 하나 들은 것이 있습니다. 폴킴은 가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는데, 형편이 어려워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수가 되겠다는 꿈을 버리지 않고 늘 연습하며 기회를 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카페에 유명한 가수가 커피를 마시러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이게 왠 운명의 장난인지. 폴킴은 그 주변을 서성거리다 용기 내어 그 가수에게 자신이 만든 곡들과 목소리를 들려주었고, 시간이 지나 폴킴은 그 가수와 함께 같은 프로그램에서 노래하는 자리까지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그 유명한 가수는 바로 지난 시간에 소개한 이적입니다. ‘비긴 어게인 3’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이적과 폴킴은 이제 함께 노래로 소통하는 동료가 되었다는 사실이, 지금의 우리들에게 희망을 줍니다.

 

가수 소개로 잠시 돌아갔지만,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저는 이 노래를 들었을 때, 우리 시대의 청년들이 떠올랐습니다. 이 노래가 지금 우리 시대의 청년들이 처해진 상황과 그 마음을 가장 잘 드려다 보고, 따스히 위로해 주는 노래라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앞서 말씀 드렸듯이, 결국 청년이라는 구분 역시, 시간을 길게 늘어뜨려 보면, 사실 우리 모두가 청년의 시기를 지나왔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인간으로서 삶을 살아가고 있기에, 우리 모두의 마음 안에 있는 청년의 모습을 위로해 줄 수 있는 곡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노래 한 번 들어보실까요?

 

폴킴

여태 뭐하다 준비도 안했어

다 떠나고 없는 아직 출발선

사람들은 저기 뛰어가는데

아직 혼자 시작도 못했어

죽을 만큼 힘들게 하고 있냐고

노력하고 있냐고

열심히 사는척하며 눈치만 보게 돼

시계는 나를 자꾸만 보채

서둘러야해

 

누가 내 맘 좀 알아줘

이런 내 맘 좀 알아줘

기댈 곳이 필요해

누가 내 맘 좀 알아줘

제발 내 맘 좀 알아줘

내 맘 좀 알아줘

 

하루만 해도 수십 번

나에게 물어 정말 자신 있냐고

여기서 멈춰버리면 후회할 것 같아

모두가 나를 위로해

그만하면 됐다고

 

누가 내 맘 좀 알아줘

이런 내 맘 좀 알아줘

모든게 다 두려워

누가 내 맘 좀 알아줘

제발 내 맘 좀 알아줘

내 맘 좀 알아줘

 

조금 더 조금만 더 가면 늘 꿈꾸던 세상

닿을 것만 같아

다시 눈뜨면 여긴 추운 겨울

버틸 수 있을까

두렵지만 가야 할 길

 

누가 내 맘 좀 알아줘

이런 내 맘 좀 알아줘

더욱 간절해져 난

제발 내 맘 좀 알아줘

그냥 나를 좀 믿어줘

내 맘 좀 알아줘

내 맘 좀 알아줘

 

시간이 흐르면 우리는 어른이 됩니다. 하지만 물리적 시간이 지나가서 어른은 이미 되었지만, 우리의 마음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어린 아이는, 아직 나는 아니라고 외칩니다. 아직 작고 약한 우리들은, 시간이 흘러 우리에게 주어진 어른으로서의 의무와 무게감이 무겁습니다. 살아가면서 내가 안고 가야할 것들, 가족, 직장, 삶의 의미, 그 모든 것들을 묵묵히 지고 가다보면, 나라는 사람, 나의 꿈들을 놓치고 가기 싶습니다. 그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 속에,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좋은 삶이라는 허황된 파라다이스 속에, 내 자신은 잊은 채 사회가 만들어 낸 관념들을 쫒아가다 보니, 지금의 나는 참 힘이 듭니다.

 

지친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이 노래를 들어보시길 권합니다. ‘누가 내 맘 좀 알아줘.’ ‘제발 내 맘 좀 믿어줘.’ ‘그냥 나를 좀 믿어줘.’라는 여리여리한 폴킴의 간절한 외침은, 우리의 가슴속에 메아리로 남습니다. 어찌 보면, 어른인척 해야 되기 때문에 감추어 왔던, 우리의 어린 마음의 외침을, 그리고 이 시대의 젊은이들의 아픔을, 폴킴이 대신 외쳐주었기에 눈물이 핑 도는 것 아닐까 생각됩니다.

 

한편으로는, 이 순간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희망입니다. 그 아무리 누군가 내 맘을 몰라준다 해도, 내가 말하기도 전에 내 맘을 알고 계시는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은 우리의 희망입니다. 우리의 간절한 외침이 기도가 되어, 그분께서 우리를 위로해주신다는 생각을 하면, 이 노래가 비관적으로만 들리지는 않습니다.

 

오늘 하루 이 노래 들으시면서 어린 아이의 마음으로 하느님께 툭 터서 대화해 보시길 권합니다. 우리 어린 마음의 간절한 외침이 하느님께 닿길 바랍니다. 여러분 그리워요.